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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인채 Apr 16. 2024

_함께


  시간이 걸리지만, 단단히 각오하고 생각을 실행에 옮긴다. 누군가의 제안을 받는다거나 하는 계기는 없다. 결국 타인에 의지할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스스로 기회를 만들고자 한다. 뾰족한 수가 있는 건 아니지만, 일단 가서 부딪혀 볼 생각이다. 그렇게 결심하니 모든 건 일사천리다. 다만, 여전히 마음에 걸리는 게 하나 있다. 어중간하게 남겨둘 일이 아니다.

  당신은 밤을 지새운다. 또 다른 꿈의 변덕이 있을까 잠을 설치는 건 아니다. 할 일이 하나 있다. 머리맡의 등을 켜고 종이 상자를 연다. 거기서 지난날 당신의 궤적이 고스란히 담긴 수첩을 꺼낸다.

  잠시 눈을 감자 어디선가 심장의 고동 소리가 들려온다. 흔들리는 기차, 마음의 요동, 거센 물결 위의 돛단배처럼 이리저리 흔들리던 볼펜, 폭풍처럼 휘몰아친 감정의 소용돌이, 알아볼 수 없는 문자의 나열, 토막토막 쓰인 글귀, 사고의 무작위한 흐름, 보내지 못한 어제의 조각, 미루어둔 내일의 꿈. 새삼 그때의 일들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그곳으로 향했던 지난날의 꿈, 당신이 그곳에 존재했다는 증거다.

  그 뒤편으로 빈 공간이 이어진다. 쓸 공간이 많이 남아있다. 꽂아둔 볼펜도 아직 쓸 만하다. 긴 세월에도 잉크는 마르지 않았다. 실로 오랜만에 볼펜을 잡고 생각나는 대로 글을 적어 본다.


  이렇게 다시 글을 써. 어디선가, 누군가에게 글을 쓴다는 건 여전히 특별한 일이네. 그나저나 많이 늦었지? 이제야 다시 가려고 해. 언제든 쉽게 돌아갈 수 있으리라 믿었는데, 어리석었어. 세월은 빠르게 지나가고, 길은 생각보다 멀더라.

  넌 어떻게 지내? 난 그 사이 제법 많이 변했어. 예전보단 융통성 있고 제법 능글맞아졌지. 그래도 넌 아마 여전할 거야. 세상에 변치 않는 건 없지만, 넌 뭔가 바뀌었다는 걸 눈치 채기 어려운 곳이잖아. 그래서인지 지금 가도 난 예전처럼 자꾸 고개를 두리번거릴 테고, 어쩐지 그때 그 모습 그대로 우리가 다시 마주칠 것 같은 기분이야.

  물론 그럴 리는 없겠지. 혹 운명의 바람이 다시 불어와 같은 일이 되풀이되더라도 이미 우린 예전과 같진 않을 거야. 다만 그대로도 괜찮다고 생각해. 가능하면 마음속에 그런 기대를 하나쯤 품고, 어디선가 너의 실루엣을 만나길 상상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좋다고 생각해.

  답장은 보내지 않아도 괜찮아. 내가 곧 갈 테니까. 그냥 소소하게 안부를 묻는다고 여겨주기를.


  거기까지 쓴 다음 당신은 볼펜을 놓는다. 그곳에 가면 이 수첩의 나머지 빈 공간부터 채워볼 생각이다. 여기에 그곳과 당신의 이야기를 다시 이어갈 것이다.

  마치 확인하듯 당신은 수첩을 훑어 맨 마지막 페이지를 펼쳐 본다. 거기엔 위아래로 큼지막한 행간을 두고 주소 하나가 적혀 있다. 조금 잉크가 번졌을 뿐 그대로다.

  어느새 밖이 하얗게 밝아온다. 고개를 돌려보니 곁엔 아샤가 잠들어 있다. 심장의 고동 소리는 아직도 선명하다. 깨어나면 용기를 내어 말할 생각이다.


  희망, 우리 같이 그곳으로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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