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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인채 Dec 11. 2017

감상의 연상작용

3 Tier Sleepers Express (기차 안에서)


# 인도 기차 안에서


흔들리는 기차, 그리고 소심한 마음의 요동,  

누군가로부터 받은 상처를 다른 누군가로부터 씻어내고 싶은 막연한 기대감,  

거센 물결의 돛단배처럼 이리저리 흔들리는 기차 속에서의 일기,

아무 생각 없는 펜의 흔들림,

사고의 지루한 흐름과 알아볼 리 없는 문자의 나열,  

곧 이어질 솔직하고 무작위적인 표현들.  


더하고 덜한 경우가 있겠지만, 인도에서의 기차 여행은 매번 길고 멀다. 워낙 큰 나라라 구간과 구간이 먼 데다가 긴 연착 시간까지 더해지는 까닭이다. 항상 예상보다 많은 시간, 심지어 며칠에 가까운 시간을 기차 안에서 보내는데, 그동안 줄곧 기다림을 버리고 다른 무언가로 채우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내게 가장 길었던 기차 여행은 부바네스와르에서 첸나이까지 가는 여정이었다. 극심한 연착이 더해져 사흘에 걸친 여정이 되고 말았는데, 벵골 만을 따라 북인도에서 남인도로 곧장 내려가는 길이었다. 


기차 안은 진실하고 견고한 인도 그 자체였다. 인도인들 틈에 매 끼니를 챙기고 때가 되면 그들처럼 짜이(인도식 차)를 마셨다. 좌석에 드나드는 인도 사람들과 간혹 이야기를 나눴고, 역에 잠시 정차하면 유한한 시간 속을 달려 역사의 먹거리를 포획해왔다. 직행으로 알고 탔지만 꼭 완행열차 같았다. 기차에 머문 시간이 길어질수록 용감해졌다. 정차한 기차 밖으로 나서면, 발을 동동 굴리면서도 경적을 울리고 바퀴가 굴러서야 아슬아슬하게 열차 안으로 뛰어들었다. 느림에 적응하자 짧은 시간이 무한히 길게 느껴졌고 평상시와 달리 여유를 부렸다. 


기차를 타는 내내 바깥 풍경을 보는 즐거움이 있었다. 무릇 여느 여행이라면 기차 여행이라면 그러한 즐거움을 만끽하기 마련이지만, 인도는 좀 특별했다. 나는 비로소 인도라는 곳에 왔음을 실감하고 있었다. 창밖으로 산이나 강이 보이지 않은 채 지평선 끝까지 확 트인 풍경이 미끄러져가고, 지나치는 역이나 간판의 달라지는 문자들은 하나하나 다채롭고 이국적이었다. 대륙의 모습을 확인한 건 인도가 처음이었고, 마침내 인도란 곳을 실감할 수 있었다. 


한층 과감해진 나는 시원한 바람을 맞아보려 탑승구로 향했다. 열차의 문은 때때로 열려 있었다. 거기서 달리는 기차 밖으로 고개를 내밀자 세찬 바람이 곧장 이마와 머릿결을 쓸고 순식간에 쓰고 있던 모자까지 벗겨갔다. 아차 싶어 고개를 돌리며 손을 머리로 가져갔을 때, 이미 모자는 춤을 추며 멀리 어딘가로 날아가고 있었다. 바보 같고 황당한 일이지만 나는 오히려 즐거웠다. 생각해보면 잊기 어려운 여행의 흔적이 이곳에 남게 되었다. 


더 이상 풍경이 보이지 않을 때는 가져온 책을 읽었다. 책을 읽다가 눈이 피로해지고 어두워지면 잠을 청했고, 더 이상 잠을 청하지 못하면 노트와 펜을 꺼내 정체불명의 글과 그림을 계속 끄적거렸다. 너무 많은 잠은 밤을 더욱 길게 만들었고, 긴 밤에는 생각도 많아졌다. 나의 소소한 인생도 노트에 적어야 할 것들이 의외로 많았다. 밤에는 2등석 열차의 삼단 침대칸 맨 꼭대기로 올라갔다. 그곳에선 모기가 들끓고 기차의 요동을 온몸으로 느끼는 대신, 객석을 떠도는 사람과 체취를 피할 수 있었다. 집중할 수 있는 공간으로 노트와 펜을 꺼내 든 곳도 그곳이었다. 물론 처음엔 글을 쓰려고 해도 내가 글을 쓰는 것인지, 열차가 글을 쓰는 것인지 분간하기 힘들었다. 열차는 얌전할 틈 없이 심하게 흔들렸고, 글자 하나하나가 형태 모를 그림이 되어갔다. 어둠 속의 노트 위로 나는 새로운 언어를 창시하는 기분이었다.  


기차 여행이 길어질수록 그 또한 적응이 되어갔다. 덜컹거리는 열차의 움직임에 이내 리듬을 타게 되고, 웽웽대는 모기 소리에도 냉정을 유지했다. 때론 흔들리는 대로 웽웽거리는 대로 놔두면 되는 일도 있었다. 맨발로 흔들리는 차 칸에 걸쳐 앉은 채 글을 썼다. 제대로 씻지 못해 허름한 행색이지만, 더 이상 무얼 바랄 것 없이 평화로운 시간이었다. 행복이란 참으로 소소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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