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인채 May 03. 2018

길을 기억하다

부다가야로 가는 길

#가야에서 부다가야로


정수리로 뙤약볕이 내리쬐고, 먼지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던 날이다. 정오를 넘어 그곳에 도착했는데, 기차에서 내리자 내 그림자는 인체 발화의 미스터리처럼 바닥 아래로 까맣게 타들어 갔다. 그림자를 버릴 듯 기차역을 나서자마자 황급히 릭샤를 잡아타고 목적지를 외쳤다. 평소처럼 값을 흥정하지도 않았다. 될 대로 돼라! 


“잘디 잘디(빨리빨리)” 

약속에 늦거나 무언가에 쫓겨 서두른 건 아니다. 이런 날씨면 빠르게 달릴수록 사방이 뚫린 릭샤 안이 그나마 시원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길을 내달리며 릭샤의 검은 매연과 하얀 흙먼지의 오묘한 조화를 한껏 맛보았다. 그래도 땀은 적당히 식었다. 그림자도 구사일생으로 내 뒤를 따른다. 주위를 돌아볼 기력이 생기자 바깥 풍경이 보인다. 선탠을 너무 오래한 듯 세상은 온통 백색이다. 과(한) 노출. 길가에 드리운 비치파라솔이 보인다. 백색 세상 속에서 유일하게 그늘을 드리운 곳이다. 이런 날이면 반라의 차림으로 돌아다니고 싶어 진다.  


파라솔은 있지만 비키니 미녀들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대신 붉은 승복으로 온몸을 휘감은 젊은 승려들이 눈에 들어온다. 그런데 이런 날씨엔 스님들마저 근엄할 수 없는 모양이다. 삼삼오오 모여 길가의 펌프로 물장난을 치고 있다. 순간 그래도 되나 싶다. 스님들이라면 좀 더 근엄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듯하다. 하지만 그 생각이 틀렸다는 걸 금방 깨닫게 된다. 

 

호스를 잡은 한 스님이 갑자기 몸을 돌려 다른 스님들에게 물을 뿌린다. 그러자 모두의 입가에 맑은 미소가 번지고 물줄기에 햇살이 번뜩이며 어렴풋이 무지개가 떠오른다. 그 모습에 내 입가에도 미소가 번진다. 어느새 더위도 가신 느낌이다.


가야에서 부다 가야로 향하던 길, 한 줌 습기 없이 더운 날, 흙길을 달리며 물장난을 치던 스님들.

아름답고 평화롭다. 꼭 근엄해야 하는 건 아니다.


#부다가야에서


매거진의 이전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