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길 TMI | 굿모닝인천 7월, Vol. 343
길모퉁이 미니 슈퍼, 구불구불 비탈길, 담벼락을 타고 오르는 넝쿨과 그 아래 놓인 작은 화분···, 골목을 걷는 것은 동시대를 기억하는 가장 다정한 방식이다. 그 안에 우리네 삶의 오늘과 어제, 내일이 있다. 새 기획 ‘골목 길 TMI’는 골목의 새로운 변화와 그 속에서도 변하지 않은 사람들의 이야기로 꾸민다. 그 첫 번째로 인천역 앞 ‘항미단길’에서 옛 그물거리를 애틋하게 지키고 근사하게 가꿔 나가려 애쓰는 사람들을 만났다.
글 최은정 본지 편집위원│사진 유승현 포토 디렉터
‘항미단길’은 인천역~해안동 로터리길을 일컫는다. 200m 남짓한 짧은 길에 선구점, 그물 가게, 공방, 카페, 양복점, 골동품 가게, 식당들이 어깨를 맞댄 채 소박하게 줄지어 있다. 이 길은 1943년에 놓였다. 당시 만석동, 화수동, 송현동에 지어진 공장에서 인천역, 인천항으로 물류를 나르기 위해 길을 냈다. 길이 뚫리면서 그물 장인, 선구점이 모여들었다. ‘그물거리’의 시작이다. 일자리를 찾아 전국에서 사람들이 흘러 들어왔다. 하지만 1974년 인천부두가 연안부두로 옮겨가며, 사람들도 떠나갔다. 오늘 항미단길에는 평생 그물거리를 지킨 상인들과 이곳에 새 숨을 불어넣은 예술가들의 일상이 공존한다.
셔터 문이 드르륵 열리자 쇠밧줄들이 정체를 드러낸다. 울퉁불퉁, 불끈불끈 선구점船具店을 꽉 채운 철근들이 주인의 팔뚝을 닮아 있다. 인천역에서 한중문화원까지 이어지는 항미단길 한가운데, 협성상회의 2대 사장 천춘식(66) 씨가 아침 일찍 가게 문을 열고 있었다.
“이게 로프, 저게 배 고정하는 고박줄. 꽃게잡이 스트링 후크도 있고. 바닥에 있는 건 빵돌 추….” 지금도 찾는 이가 있는지 묻자 “다들 쓰임새가 중한 것들”이란 답이 돌아온다. 물건 찾는 손님보다 두런두런 추억 나누러 오는 이가 더 많지만 가게엔 지금도 없는 게 없다.
“바로 저기, 인천역 뒤편이 부둣가였잖아. 올림포스호텔 주변, 만석부두까지 선구점이 수십 개였어. 근데 연안부두로 몽땅 옮겨가면서 다 떠나갔어. 이제는 이 골목이 ‘인천부두 박물관’이라고 보면 돼.”
인천광역시 중구 제물량로 252
2대째 선구점을 운영하는 협성상회.
손님보다 추억 나누러 오는 이가 더 많지만
가게엔 여전히 없는 게 없다.
유종대(80), 김만순(72) 부부가 인천에 온 건 45년 전쯤. 서산 천수만 간척사업으로 터전을 잃고 먹고살 길 찾아 다다른 곳이 ‘그물거리’였다.
“남편이 여기 와서 일주일 둘러보더니 그물 장사 하자고. 그땐 고깃배도 잔뜩이고, 다들 부두에서 고등어, 갈치 떼다가 내다 팔고 그랬슈.” 해불양수海不讓水. 바다를 닮은 인천 사람들은 타지에서 온 젊은 부부에게 곁을 내줬다.
1980년대까지 호시절이 이어졌다. 인천항에 들어오는 화물선, 고깃배는 물론이고 전국에서 주문이 밀려들었다. 네댓 명의 직원을 두고 밤새 그물을 만들어야 간신히 납기를 맞출 정도였다.
“요즘은 바다 않고, 육지 그물 해. 실내 낚시터, 골프장, 야구장, 놀이터나 박물관에 설치하는 안전망, 지금도 수백 가지 만들어. 쇄빙선 그물도 내가 만든겨. 해양수산부 연구원, 출렁다리업체 직원들도 여전히 찾아오고.” 항미단길의 그물집은 이제 단 네 곳. 골목길 풍경은 변했지만 노장은 여전히 건재하다.
인천광역시 중구 제물량로 252-2
엽전, 곰방대부터 ‘메이드 인 USA’ 펩시 포스터, 필름 카메라…. 항미단길 끝 ‘고향’에는 골동품이 느긋하게 햇볕을 쬐고 있다. 원도심에서 나고 자란 이기용(71) 대표가 모은 것들이다. “1970~1980년대엔 중구가 인천의 중심이었지. 학생도 많고 사람이 바글바글 했어. ‘미담다방’, ‘흐르는 물’… 이런 데서 커피 마시고, 음악 듣고 그랬어.” 아련한 추억처럼 색 바랜 LP판에 그의 시선이 닿는다.
인천광역시 중구 제물량로 256-2
조은경(59) ‘도자기공방 민’ 대표는 외할머니와의 추억이 가득한 이 거리가 초라해진 모습을 보고 무작정 자리를 잡았다. 2019년, 골목이 알려지기 전이다.
그의 기억 속에 이곳은 언제나 활기가 넘쳤다. 조금만 뛰어나가면 달려들던 바다와 갯내음, 서울을 오가던 ‘다라이’ 생선 장수, 한염해운韓鹽海運, 제빙 공장의 기계 소리가 오케스트라 연주처럼 울려 퍼졌다.
“청나라와 일본 조계지와는 완전히 다른 역사를 품고 있어요. 우리 선조들이 오롯이 삶을 일구던 ‘인천부두’의 역사가 켜켜이 쌓인 귀한 곳이에요. 더 늦기 전에 기억하고 알리고 싶었어요.”
조 대표는 본인의 뜻을 골목의 터줏대감인 그물 장인, 유통 상가 대표들에게 간곡히 전했다. 또 개인적으로 좋아하던 예술가들에게 골목을 가꿔보자고 진정성 있게 요청한 끝에 칠보·규방·가죽공예 작가들이 합류했다. 그들과 함께 ‘항미단길’이란 고운 이름을 짓고, 중구청·인천광역시립박물관의 문도 부지런히 두드렸다.
무던히 애쓴 지 3년, 골목이 몰라보게 밝아졌다. 오늘 항미단길은 선구점의 육중한 질감, 추억과 향수, 예술가들의 일상이 모두 공존한다. 앞으로도 골목은 진화할 것이다.
인천광역시 중구 제물량로 252-1
이 골목의 막내는 작년 이맘때 문을 연 터프팅공방 ‘원트모어’의 박현아(29) 대표. 터프팅은 캔버스에 건으로 실을 쏘아 러그, 액자 같은 것을 만드는 다이내믹한 공예다. “너무 고요하지도, 너무 북적이지도 않는 딱 좋은 평온함이 항미단길의 매력”이라며 환하게 웃는다.
인천광역시 중구 제물량로 250
오늘 항미단길은 선구점의 육중한 질감, 추억과 향수,
예술가들의 일상이 모두 공존한다.
오래된 골목이 재미있는 이유다.
지난 5월 13일, 항미단길에 아주 특별한 공장이 문을 열었다. 30년간 각종 선구를 제작하고 팔던 ‘진원로프’를 재단장한 문화 공장 ‘앵커1883’이다.
“처음엔 엄두가 안 났는데, 세 번째 왔을 때 어두컴컴한 공장이 ‘수장고收藏庫’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날 송근욱(58) 대표는 이 프로젝트에 ‘인디아나 존스’라는 이름을 붙였다. 귀한 유물을 발견하듯 방치됐던 공장을 비우고 채우는 데 꼬박 1년이 걸렸다. 거대한 로프, 닻을 생산하던 골조를 그대로 살리 고, 공장에 쌓여 있던 것을 최대한 남겨두었다.
“어느 날 망치질을 하는데, 벽에서 쌀겨가 쏟아져 나오는 거예요. 이 건물이 1960년대에 냉동창고로 쓰였다고 하더군요. 선구점, 꽃게 냉동창고… 인천을 지탱한 산업이잖아요. 아, 지켜 내길 잘했구나.”
송 대표는 이곳에서 문화예술 분야를 뛰어넘는 다양한 활동이 일어나길 바란다.“‘앵커(anchor)’는 닻을 뜻하지만, 앵커 시설을 의미하기도 해요. 인천은 역사 문화 자원이 풍부한 도시입니다. 그 특별함을 동력으로 골목의 변화를 이끌어내고 싶어요.”
인천광역시 중구 제물량로 242 1~3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