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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ale Ale Aug 08. 2018

교토 기행

오래된 옛 수도의 고집스러움

일본의 옛 수도, 교토는 이런저런 일로 많이 다녀서 처음 갔을 때 느꼈던 감흥이 더 이상 없지만, 그래도 갈 때마다 뭔가 새로운 것을 보게 된다. 일본의 도시 중에서는 제일 좋아하는 도시이다. 경주와 비교되는 천년고도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경주가 전쟁 등으로 옛 모습이 훼손된 것에 비해 교토는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어서 오랜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교토의 상징이랄 수 있는 건물이 금각사이다. 일본을 대표하는 사찰이기도 하고 금칠을 해놓은 것이 독특하고 눈부시지만, 개인적으로 그다지 좋아하는 건물은 아니다. 더구나 불타서 소실된 것을 다시 재건축한 것이라 역사적 의미도 찾기 어렵다. 그래도 우리 전통 건축물과는 달리 딱딱 아귀가 맞아떨어지는 일본식 정교함이 잘 나타나 있는 건물이다. 24K로 금칠을 한 것에서는 좀 천박함도 느껴져서 교토의 다른 사찰과 비교할 때 썩 선호하는 건물은 아니다.

금각사


은각사는 은이 아니라 정원의 흰모래로 인해 금각사와 대비되어 은각사라 불리는데, 금각사보다는 낫다. 차분하고 소박한 매력이 있다. 하지만 금각사와 마찬가지로 일본인들이 그렇게 찬미하는 이유를 수긍하기 어렵다. 몇 번을 가봐도 여전히 유명세만큼의 아름다움을 찾기는 어려우니 아마도 나의 심미안 수준이 그저 그런 수준이라 그런가 보다 한다.

은각사


여러 번 교토를 들락댔음에도 처음 가본 33 간당은 충격이었다. 겉으로 보면 크게 인상적일 것은 없는 건물이다. 내부를 봐야 왜 충격인지 설명이 가능한데, 사진 촬영 금지라 사진이 없다. 일본을 다시 평가하게 되는 건물이다. 이 엄청난 작품이 1100년대에 지어졌다니, 놀랍다. 이어령 씨가 "축소지향의 일본인"을 썼는데, 이것이야말로 일본에 대한 편견을 고착화시킨 매우 나쁜 저작이 아닐까 싶다. 이어령 씨의 깊이가 부족했던지 아니면 대중적 인기에 "영합"한 것이었던지 모르겠지만, 일본은 그렇게 축소만을 지향한 민족은 아니었다. 그리고 우리가 흔히 생각하듯 우리에게 모든 문화를 전수받은 오랑캐도 결코 아니었다. 33 간당을 보면, 아마도 이미 고려시대에 일본이 우리나라의 국력을 넘어섰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33간당


역시 이번에 처음 찾은 귀무덤은 우리에겐 남다른 의미이다. 임진왜란 때 왜군이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전공의 증거로 조선인들의 귀와 코를 잘라서 보냈는데, 그 무덤이다. 수치스러운 역사의 현장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신사 바로 앞에 있어서 더욱더 치욕적이다. 


교토에 올 때마다 주로 유명 관광지 위주로 돌아다니고, 저녁에 이자카야에서 술 한잔 기울이는 것이 주된 활동이었던지라, 역사에 대해 깊은 생각을 한 적이 없다. 이번 기행에서 좀 더 차분히 생각을 하면서 교토를 돌아보니, 일본이 감히 중국을 치겠다며 조선에 길을 내어달라는 요구를 할 수 있었는지 이해가 되었다. 일본의 국력이 능히 그런 야망을 품을 만도 하였다. 그저 오랑캐라 멸시하고 안일하게 생각한 우리 조상들의 무능함이 자연스레 오버랩된다. 하긴 지금도 일본을 무시하는 한국인들이 태반이지만.

귀무덤


교토의 유명한 전통시장, 니시키 시장. 4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시장답게, 이곳의 가게들도 400년을 이어오는 역사를 자랑한다. 유명한 계란말이 집에 들렀다. 하도 유명해서 먹어봤지만, 솔직히 맛은 별로이다. 개인 입맛 취향이긴 하지만. 여하튼 징그러운 일본인들, 몇백 년을 가업으로 이어서 계란말이를 하고 있다. 장점일 수도 있고 단점일 수도 있겠지만, 전통을 이어간다는 측면에서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있다.

니시키시장의 계란말이집


교토에는 과거 제국대학이었던 교토대학과 더불어, 사립 명문인 도시샤대학이 있다. 도시샤대학에는 오래된 근대건축물을 재단장한 멋지고 분위기 만점인 게스트하우스가 있다. 호텔이 아닌지라 약간 불편하지만 고즈넉한 그 분위기가 너무 좋아서 기회가 닿으면 여기서 묵곤 한다. 


이 대학 교정에는 윤동주와 정지용의 시비가 있다. 두 사람 모두 도시샤대에 유학을 했었다. 도시샤는 한문으로 동지사이고, 기독교 계열 학교이다. 교토에 갈 때는 꼭 도시샤대학에 들러서 두 사람의 시비를 참배하고 온다. 방문한 그날 정지용 시인 시비에는 누군가가 "처음처럼" 소주병도 가져다 놔서 가슴 뭉클했다. 

'소주 한잔 진하게 하시고, 편히 쉬소서.'



윤동주 시비
정지용 시비


정지용이 도시샤대에 유학하던 당시 지은 시, "카페 프란스"이다. 교토에 유학한 망국 출신 식민지 시인의 퇴폐적 정서를 잘 표현하고 있다. 마침 비가 추적추적 내렸고, 어느 선술집에 들어앉아 사케에 취하면서, 동행한 한국 최고 서정시인의 입으로 정지용의 시를 들으니, 마치 그 시절 교토에 있는 듯한 착각에 젖었다. 나라 잃은 시인이, 차가운 대리석 바닥에 뺨을 대고 식민지인의 서러움을 뼈저리게 느끼고 읊은 그 시가, 세월을 뛰어넘어 지금도 심금을 울린다.


"카페 프란스"


옮겨다 심은 종려나무 밑에

비뚜루 선 장명등,

카페 프란스에 가자.


이놈은 루바쉬카

또 한 놈은 보헤미안 넥타이

뻐쩍 마른 놈이 앞장을 섰다


밤비는 뱀눈처럼 가는데

페이브멘트에 흐느끼는 불빛

카페 프란스에 가자.


이놈의 머리는 비뚤은 능금

또 한 놈의 심장은 벌레 먹은 장미

제비처럼 젖은 놈이 뛰어간다.


‘오오 패롯[鸚鵡] 서방! 굳 이브닝!’


‘굳 이브닝!’(이 친구 어떠하시오?)


울금향 아가씨는 이 밤에도

경사 커―튼 밑에서 조시는구려!


나는 자작의 아들도 아무것도 아니란다.

남달리 손이 희어서 슬프구나!


나는 나라도 집도 없단다.

대리석 테이블에 닿는 내 뺨이 슬프구나!


오오, 이국종 강아지야

내 발을 빨아다오.

내 발을 빨아다오.

({학조} 창간호, 192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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