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주는 양조장에서 마셔야 제일 맛있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게 되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
아주 오래전에 읽은 유홍준 선생의 문화유산 답사기에 나오는 구절인데, 정확한 표현인지 확신은 없다. 옛 성현의 말을 유홍준 선생이 인용한 것인지, 본인의 말인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여하튼 대략 그런 의미였다고 기억한다. 물론 유홍준 선생이 의미한 것은 술이 아니었겠지만, 사실 어디에 가져다 붙여도 멋들어지게 들어맞는 문구 아닌가!
맥주를 사랑하다 보니 알고 싶어 지고, 더 많이 알게 되었고, 전과 같지 않게 보게 된 것도 맞지만, 알 때나 모를 때나 취하는 것은 변함없다. 다만 알게 되니 영악해져서 알코올 도수와 맛이 조화를 이루어 기분 좋게 취하는 방법을 모색하고, 또한 가급적 값싸고 맛있게 취하는 방법을 나름 찾아가고 있다.
맥주를 사랑하게 된 것은 사실 오래되지 않는다. 국내 맥주의 맛이 워낙 그런지라 폭탄주 이외의 용도로 생각해본 적이 없기에 그렇기도 했지만, 블라인드 테스트를 해보니 사람들은 맥주 맛을 정확하게 구분하지 못한다는 연구 결과도 있기에 굳이 맥주를 사랑할 이유를 찾지 못했었다. 이것은 와인도 마찬가지여서 유명 소믈리에들도 블라인드 테스트에서는 제대로 구별을 하지 못한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또한 나 자신이 미식가도 아니고 맛에 둔감하다는 사실도 상당히 기여를 했다. 조금 더 솔직해지자면, 과거에는 사람들과 함께 취하기 위해 마셨기에 맛이 중요하지 않았다.
맥주가 정말 맛있다고 처음 느꼈던 것은, 삿포로에서 맥주박물관을 찾았을 때이다. 박물관 견학을 하고 옆에 위치한 삿포로 맥주원에서 식사를 하며 맥주를 마셨는데, 내가 알고 있는 맥주의 통념을 깨고 기가 막히게 맛이 있었다. 하지만 똑같은 삿포로 맥주를 슈퍼에서 사서 마시니 영 그 맛이 아니어서 그렇게 맥주에 대한 고정관념이 굳어지나 싶었다.
신세계에 눈을 뜬 것은 벨기에에서 맥주를 마시고 나서였다. 식사 때마다 다양한 종류의 맥주가 나왔는데 이런 신세계가 있나 싶었다. 수천 종의 맥주가 벨기에에서 만들어진다는 사실에 놀랐고, 수도원에서 만든 맥주가 그렇게 맛있는 것은 신의 손길이 닿아서인가 싶기도 했다. 벨기에 친구들의 맥주 사랑도 대단해서 밤늦게까지 펍을 전전하며 온갖 맥주에 흠뻑 취했었다. 한국 맥주는 웬만큼 마셔도 취하지 않았기에, 난생처음 맛보는 맥주의 향에 반해 도수가 몇 도 인지도 모르고 이것저것 벌컥벌컥 마셔댔으니 취한 것이 당연했다.
벨기에 맥주를 마시고 난 이후부터 맥주는 폭탄주 제조용이 아니라, 사랑하는 대상이 되었다. 사랑하니 알고 싶어 지고, 알게 되니 새로운 것을 보게 되었다. 여행을 가면 반드시 현지의 맥주를 찾아서 마셔보고, 새로운 발견의 기쁨을 찾는다.
맥주는 양조장 바로 옆에서 마시는 것이 가장 맛있다. 유통과정에서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수입맥주들이 국내에서 판매되고 있지만, 제맛을 느끼려면 현지에 가서 마셔야 한다. 가까운 동남아시아의 맥주들도 현지에서 마시면 국내에 수입된 맥주를 마시는 것보다 더 맛있다.
동남아 맥주 중 내가 가장 사랑하는 맥주는 비어라오이다. 라오스에서 이렇게 맛있는 맥주를 만든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데, 맥주 맛과 경제력을 연관시키려는 편견을 보기 좋게 깨버린다. 라오스 현지에서 마시는 비어라오는 정말 맛있다. 또한 겁나게 저렴해서, 우리네 댓 병 한 병에 1000원가량이다. 라오스에서 식사를 할 때는 의례히 물 대신 비어라오를 시켜 마신다. 가게에서 사가지고 오건 식당에서 마시건 라오스에서 비어라오의 가격은 어디 가나 대략 천 원 정도이다.
전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한 아시아 맥주는 뭐니 뭐니 해도 필리핀의 산미구엘일 것이다. 필리핀에서 마시는 산미구엘은 한국에서 마시는 맛과 틀리다. 남국의 정취에 크게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니라고는 자신하지 못하겠으나, 보홀 섬 알로나 비치의 펍에서 마신 산미구엘은 환상적이었다. 필리핀 현지에서 산미구엘 한 병이 대략 900~1000 원가량 하니, 저렴하기도 하다.
베트남 사이공 맥주도 빼놓을 수 없다. 굳이 선호하는 순위를 매기라면 동남아 맥주 중에서는 비어라오 다음으로 비아사이공이 좋다. 역시 마찬가지로 한국에서 마시면 그 맛이 나지를 않는다. 사이공에 가서 마셔야 한다. 반면, 하노이 맥주는 사이공에 비해 맛이 많이 떨어진다.
캄보디아의 앙코르 비어도 나름 독특한 컬러를 가지고 있다. 현지에서라면 다른 맥주보다는 앙코르를 마시겠지만, 딱히 선호하지는 않는다. 태국의 대표 맥주 싱하나 창, 레오 등도 태국을 가면 마시지만 굳이 국내에서까지 찾지는 않는다. 사실 태국에서도 비어라오가 있는 펍에서는 종종 라오를 마신다.
위에 언급한 맥주들은 주로 라거 계열 맥주인데, 정말 좋아하는 맥주는 에일맥주이다. 에일 중에서도 호프의 쓴맛이 강한 인디아 페일 에일(IPA)을 특히 좋아한다. 에일맥주는 그 특성상 더더욱 양조장 가까운 곳에 가서 마셔야 한다. 감명 깊게 읽은 책 중 하나가 "유럽 맥주 견문록"인데, 최상의 맛을 찾아서 직접 현지로 찾아간 기록이다. 소위 비어 벨트라 불리는 맥주 생산지를 하나하나 밟아가며 영국, 벨기에, 독일, 체코, 네덜란드의 유명 양조장을 방문하고, 경건한 마음으로 공복에 맥주를 부어 넣는 저자의 정성이 감동스러운 책이다. 그 정성에는 미치지 못할지언정 최소한 영국과 아일랜드의 펍 순례는 한번 해볼 작정이다.
유럽을 술로 나누면 크게 비어 벨트와 와인 벨트로 나눈다. 주로 북유럽 쪽이 맥주를 마시고, 프랑스와 남유럽, 그러니까 이탈리아, 스페인, 포르투갈 지역이 와인 벨트이다. 기후에 따른 자연스러운 결과이다. 맥주 하면 흔히 독일을 떠올리고 독일 사람들의 맥주 사랑이 엄청나기는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벨기에와 영국 쪽의 에일 맥주를 선호한다.
독일이 마치 맥주 종주국과 같은 이미지를 가지게 된 것은 "맥주 순수령"이라고 하는 독일의 법이 큰 영향을 미쳤다. 1516년 빌헬름 5세는 맥주의 원료를 보리 몰트, 호프, 물로 제한하는 법령을 공표했고 이 법령에 따라 독일에서 제조되는 맥주는 다른 원료를 첨가할 수 없게 되었다. 사실 이 법령은 맥주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한 목적이 아니다. 당시에는 맥주의 원료로 주로 밀을 사용 했는데, 그러다 보니 빵을 만들 재료가 부족해져서 맥주를 보리로 만들도록 강제하기 위해 만들어진 법령이다. 아이러니는, 맥주 순수령 법령을 제정한 빌헬름 5세가 바이에른 영주였고 정작 자신의 영지인 바이에른은 이 법령에서 제외되는 특혜를 누렸다. 그 결과 지금도 바이에른 지방의 밀맥주는 특히 유명하다.
전적으로 개인의 취향이지만, 맥주 순수령을 지키는 독일 맥주보다는 다양한 재료를 혼합해서 수천 가지 종류의 맥주를 만드는 벨기에의 방식이 더 합리적이 아닐까 싶다. 독일, 벨기에, 네덜란드 사람들의 맥주에 대한 자부심은 대단해서, 서로 무시한다. 벨기에 친구가 맥주를 마시다 말고 내게 "보트에서 하는 섹스와 네덜란드 맥주와의 공통점이 무엇인지 아느냐"라고 물었다. 모른다고 하자 "둘 다 물에 가깝다"라고 알려주곤 좋아 죽는다. 독일 사람들은 독일 맥주만이 진짜 맥주라 여기고, 특히 벨기에 맥주를 온갖 잡탕 재료를 넣은 혼합물이라고 은근히 무시한다.
어쨌거나, 내 입맛에는 페일 에일 맥주가 제일 맛있다. 라거 맥주가 전 세계를 점령한 것에는 틀림없이 그만한 이유가 있고, 라거를 선호하는 사람들의 숫자가 더 많은 것도 사실이다. 라거의 원조격인 체코의 필스너 우르켈도 좋기는 하지만, 편의점에서 자주 손이 가지는 않는다 (필스너 우르켈은 오리지널 필스너라는 뜻이니 이름조차 원조의 자부심이다).
라거는 에일에 비해 낮은 온도에서 발효시키고, 효모가 주로 아래쪽에서 발효한다고 하여 하면 발효맥주라고 한다. 반면 에일 맥주는 상대적으로 높은 온도에서 상면발효를 한다. 라거는 등장 이후 깔끔한 맛과 유통기간의 장점 등 여러 복합적 이유로 맥주 시장을 평정했는데, 대중의 기호에 부합한 결과일 것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라거를 선호한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나는 페일 에일, 그중에서도 인디아 페일 에일(IPA)이 좋다. 크라프트 맥주가 성행하는 요즘에는 IPA도 종류가 워낙 많아서 일반화시킬 수는 없지만.
내가 양조장 근처로 가서 맥주를 마시는 것이 한계가 있으니, 아예 양조장을 내 곁에 만들겠다는 생각을 해보기도 한다. 지금도 집에서 맥주를 발효시켜 마시기는 하지만, 이것도 나름 귀찮은 일이라서 편의점 만원에 4캔이 그저 고맙다. 그나저나, 영국 맥주 순례는 언제나 가볼 수 있으려나. 산티아고 순례길 보다는 맥주 순례길이 훨씬 더 매력적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