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Pale Ale Mar 31. 2018

보수주의자의 영화

그랜 토리노와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작품 세계

뛰어난 재능을 가진 영화감독들도 많고, 이들이 만들어낸 걸작 영화도 많다. 그런 영화에 순위를 매길 수는 없지만 개인 취향에 따라 선호하게 되는 감독과 영화가 있는데, 개인적으로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그런 감독 중 하나이다. 


젊은 시절의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소위 스파게티 웨스턴 장르의 스타였다. 1960년대, 세르지오 레오네 감독의 스파게티 웨스턴 영화에서 무명의 건맨을 연기하여 스타로 부상한 만큼, 마초적 이미지의 배우로서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그리고 1970년대에는 더티 해리 시리즈에서 법보다 주먹을 앞세우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정의를 실천하는 경찰 해리 캘러한 역으로 그 이미지를 이어갔다.


연기자로서도 매력적인 인물이지만, 클린트 이스트우드를 진정으로 평가하게 된 것은 그가 배우로 연기한 작품보다는 감독으로 연출한 작품을 보고 난 이후이다. 대부분 진보주의자인 헐리우드에서 드물게 보수주의자를 자처하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작품들은 그의 성향과 가치관을 잘 보여준다. 요란하지 않고 조용하게, 그러나 탄탄하게 전개되는 그의 영화들에서 진정한 보수의 품격을 느낄 수 있다.


그런 이스트우드 영화적 특성을 가장 고스란히 드러내는 걸작이 그랜 토리노 Gran Torino이다. 보수의 가치와 품위란 바로 이런 것이라고 웅변하는 듯한, 울림 깊은 영화이다. 이 영화를 통해 미국이 가지고 있는 힘의 근원을 살짝 엿볼 수 있다고 한다면 과장이 될지 모르겠지만, 한 사회를 지탱하는 힘의 뿌리가 이 보수주의 노장이 만든 영화에 묻어 나온다.



그랜 토리노에서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분한 월터 코왈스키는 은퇴한 자동차 공장 노동자이다. 완고하고 지독한 인종차별주의자인 코왈스키는 옆집에 사는 몽족 가족이 영 못마땅하다. 영어도 제대로 못하는 아시아인들이 이웃에 득시글대는 현실이 불만인 코왈스키는 시도 때도 없이 옆집 가족에게 독설을 퍼붓는다. 완고하고 무식한 전형적 백인 보수 꼴통의 모습이 바로 코왈스키이다. 트럼프에게 표를 던진 미국 러스트 벨트의 유권자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한국전 참전용사인 이 늙은 보수 꼴통은 변화하는 미국이 영 불만이다. 그가 목숨을 걸고 지키기 위해 싸운 미국의 가치가 변화하는 현실에 적응하기 어렵다. 특히 그가 믿는 미국적 가치를 무시하는 (심지어 영어조차 못하는) 이웃의 아시안들은 변해가는 미국의 현실을 상징하고 있고, 이들은 코왈스키에게는 참을 수 없는 변화이다. 한때 백인 중산층이 살았던 동네가, 산업이 침체되고 경제가 붕괴되며 이제는 백인들은 하나 둘 떠나고 아시아 이민자들이 득시글대는 동네로 변한 현실에 대한 불만은 코왈스키가 내뱉는 독설에 고스란히 나타난다.


그런데 이 무식한 백인 보수 꼴통을 미워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은, 바로 그가 지키고자 하는 가치에 대한 확고한 신념 때문이다. 어떤 일이 있어도 흔들리지 않는 확고한 신념. 목숨을 걸고라도 지키야하는 원칙은, 코왈스키에게는 절대로 양보할 수 없는 가치이자 생활양식이다. 바로 이 점이 미국라는 나라가 가지고 있는 여러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강대국으로서의 지위를 잃지 않고 있는 힘의 근원이고 보수의 힘이라고 영화는 말하고 있다. 상황에 따라 변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경우에도 흔들리지 않고 지켜내야 할 신념과 가치를 목숨을 걸고 지켜내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 바로 그것이 사회를 건강하게 지탱하는 근간이다. 


코왈스키가 믿는 미국적 가치 중의 하나는 “정의”이다. 비록 지독한 인종차별주의자이지만, 옆집의 몽족 가족이 갱단의 폭력에 희생당하는 현실 앞에서 코왈스키의 “보수 꼴통 기질”은 인종을 차별하지 않는다. 코왈스키의 완고한 신념은 부당한 폭력을 묵인할 수 없다. 비록 그 폭력의 희생자가 자신이 그렇게 싫어하는 이웃 아시아인이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묵과할 수 없는 것이 코왈스키가 지키는, 그리고 지켜야만 하는 가치이다. 진정한 보수라면 자신의 개인적 이해관계를 떠나서 보편적 가치와 신념을 지켜야 하고, 코왈스키는 그런 보수의 전형을 보여준다. 정의는 인종과 상황에 따라 변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정의는 정의인 것이고 그것을 절대적으로 지켜야 하는 엄숙한 보수주의자의 신념이 영화에서 담담하게 그려진다. 물론 코왈스키가 대단한 이념이나 생각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의 완고한 보수적 기질은 흔들리지 않는 "원칙"을 기반으로 하고 있고, 이것은 미국이라는 사회의 평범한 일반 서민이 갖고 있는 보수적 기질을 잘 상징하고 있다.


영화에서 코왈스키는 이웃 몽족 가족을 지켜주기 위해 용감하고 정의로운 선택을 하고 영웅적인 최후를 맞는다. 이를 통해 영화는 코왈스키와 같은 평범한 백인 노동자들이 미국 사회를 건설하고 유지해온 근간임을 부각시킨다. 침묵하는 보수의 힘을 잘 보여주고 있다. 화려한 수사로 떠드는 진보주의자들의 향연 뒤에서 묵묵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스스로의 가치관에 따라 성실하게 실천하는 삶을 사는 평범한 시민이 미국이라는 사회를 지탱하는 근간임을 잔잔하게 풀어놓는다.


그랜 토리노 뿐 아니라,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감독한 영화는 전반적으로 비슷한 흐름이 있다. 보수의 가치관이 조용하게 녹아들어서 담담하게 그려지는 그러한 흐름. 보수주의란 무조건 옛것을 고집하는 완고함이 아니다. 합리적으로 사고하고 원칙을 지키며, 비록 느리게나마 변화를 거부하지 않고 따라가는 것이다. 코왈스키의 모습에서 그러한 흐름이 잘 나타나 있다. 이웃 몽족 가족을 무시하고 차별하지만, 그것이 온전히 흘러가는 변화임을 받아들이고, 인종에 관계없이 "사람"을 알게 되면서 코왈스키의 편견은 서서히 사라지게 된다. 종국에는 그만의 거칠고 어색한 방식이지만 이웃 사람들에게 마음을 열고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가 지키고자 하는 미국적 가치관인 "정의"를 실천하기 위해 기꺼이 목숨을 내놓는다.


클린트 이스트우드 영화의 공통점이지만 그랜 토리노에서는 미국적 보수를 상징하는 상징이 여럿 등장한다. 코왈스키 자신부터 전형적인 미국 백인 보수주의 노동자를 나타낸다. 독립적이고 완고하고 신념을 지키기 위해 기꺼이 자신을 희생시키는 인물이다. 그가 애지중지하는 자동차 그랜 토리노는 과거 미국이 번영을 구가하던,  젊었고 풍요로웠던 시절 평범한 백인 노동자들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 자동차이다. 그래서 그들이 자랑스럽게 자신을 드러냈던 상징 같은 자동차이다. 


코왈스키가 항상 지니고 있는 엽총 또한 전형적 미국 백인 보수주의자의 상징이다. 끊임없이 총기사고가 일어나고 어린 학생들이 학교에서 총기 난사로 죽어나가는 일이 계속 일어나고 있음에도 총기를 규제하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총이 상징하는 지극히 미국적인 가치 때문이다. 자신과 가족을 내손으로 보호한다는 개척시대로부터의 유산으로 인해 굳어진 총에 대한 집착은 매우 미국적이어서 이를 규제하는 것은 지금 현재에도 난망하다. 코왈스키와 같은 미국인들에게 총은 절대 포기할 수 없는 신념과 같은 것이다.


영화에서 코왈스키의 이웃으로 많은 아시아 인종 중에서 하필 몽족이 선정된 것은 미국 보수가 갖고 있는 책임감을 상징하고 있다. 몽족은 베트남 북부와 라오스, 태국 등지에 분포해 있는 고산족이다. 이들은 베트남 전쟁 때 미국에 협력하였고, 미국이 전쟁에 패하고 물러나자 엄청난 박해를 받았다. 많은 몽족이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했고, 미국은 책임감을 가지고 이들을 자국에 정착하도록 지원하였다. 그러니 참전용사인 코왈스키가 결국 마음을 열고 지켜줘야 할 대상으로 몽족보다 더 적절한 대상은 없을 것이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영화를 보면서 항상 느끼는 감정은, 보수주의자로서 지키는 가치관을 영화에서 참 잘 풀어내고 있기에 이를 지켜보며 느끼는 부러움이다. 결코 경박하지 않고 잔잔하면서도 힘 있게 다가오며 깊은 울림이 있는 그의 영화는 지극히 보수적이지만 오래 잊히지 않는 감흥을 준다. 그리고 아울러 한국 사회에서 보수를 자처하는 사람이나 집단의 천박함을 보며 상대적으로 더욱 짙은 환멸을 느낀다. 오로지 자신의 이익에 따라 갈대처럼 변하는 사람들이 보수를 자처하는 것을 보면 정말 슬프다. 한국 사회가 숙명적으로 가지고 있는 그 척박한 현실 때문에.

매거진의 이전글 컨택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