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이야기가 시작하는 시점까지의 이야기.
지금은 부모의 직업이나 수입에 대한 조사를 학교에서 필수 사항으로 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내가 학생이던 시절에는 그렇지 않았다.
부모의 최종 학력이 있었으며, 부모의 직업이 있었고, 부모의 연소득에 대한 서술 항목이 있었다.
항상 고민이었다.
아버지의 직업을 뭐라고 해야 하는지, 우리 가정의 연소득이 어떻게 되는 건지.
자영업자로 해야 하는가, 소상공인이라고 해야 하는가, 아니면 공장운영이라고 해야 하는가의 문제로 고민해야 했다.
공무원으로 일 하던 아버지께서는 어려운 가정환경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안정성보다는 위험성 있으나 수익이 높은 방법을 선택하셨다.
젊은 시절의 경험을 바탕으로 중고 기계를 구입하였고, 대출로 만든 단층집의 지하에 기계를 넣어 공장을 시작하셨다.
기계는 고치면 된다는 생각으로 중고 기계를 구입했으나, 기계 수리에는 기술자가 필요했고 그에 필요한 부속이 필요했으며, 단순하게 양말을 만드는 게 아니라 그것을 온전한 상품으로 만드는 기술이 필요했다.
참담했다.
기계는 작동하지 않았고, 상품은 생산되지 않았다.
하염없이 시간을 보낸 것이 아니었기에, 다행스럽게도 노력은 배신하지 않았고 잘 사는 집은 아니었으나 한 가족이 먹고 살아가고 자녀를 교육시키기에는 부족하지 않을 수익을 만들게 되었다.
무지함에서 시작된 부모의 노력으로 지금의 내가 있었고, 나의 배움과 삶의 상당 부분이 부모의 노력으로 세상에 나온 양말로 인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소위 양말공장 사장님으로 자랐던 내 추억은 조금 특별하다.
양말이 산처럼 쌓여있는 작은 방에서 뛰어놀다가 어른들께 꾸중을 들었고, 집 청소에는 걸래가 아닌 상품 가치가 없는 양말을 사용했으며, 동생과 눈싸움 대신에 양말을 뭉쳐서 던지기 놀이를 했다.
주말이면 빈 공장의 기계를 돌리며 부모님은 일 하셨고, 그날의 수익을 유추해서 가족들은 저녁 외식을 갔었다.
이사 가는 날은 동네의 구경거리가 되었다.
커다란 양말 기계를 커다란 트럭에 올리기 위해서 성인 장정 4명이 붙어서 무거운 쇳덩이를 옮기는 모습은 작은 주택이 모여있는 골목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장면은 아니었다.
대구로 이사오던 그날도 그랬다.
대형 트럭에 올려진 쇳덩어리로 된 기계를 성인 4명에서 6명이 한 그룹을 형성해서 구령에 맞춰 힘을 주고 들어 옮기는 장면에 지나가던 행인들도 신기하게 보곤 했다.
학년이 올라가고, 진학의 흐름에 빠지게 되면서 집보다는 학교와 독서실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공장에 대한 내 삶의 관여는 없다고 생각했다.
원사가 들어오고, 그것이 양말이 되고, 판매되어 소비자의 손에 들어가고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부가가치가 우리 가족과 공장에서 일손을 더하는 사람들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었다는 것은 내가 일을 시작하고 나서 알게 된 사실이었다.
군에 입대했던 시절, 공장의 역사는 끝나게 되었다.
일 하던 사람들과 좋은 관계에 있었지만 어디서든 소수의 몇몇이 문제를 일으켰다. 함께 수익을 창출하는 방법을 고민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수익의 원인을 외부가 아닌 조직에서 추출하려는 사람이 있었고, 그런 갈등이 아버지로 하여금 사업을 정리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던 것 같다.
공장을 정리하고 몇 년을 쉬셨다.
그리고 다시 공장을 시작하셨다.
작은 규모로, 직원을 고용하지 않고, 두 분 이서만 운영하겠다는 생각으로 소규모의 공장을 시작하셨다.
바뀌는 건 없었다. 실을 주문하고, 디자인을 하고, 방직을 한다. 기계의 결과물 중 상품과 상품이 아닌 것을 구분하고, 주문받은 수량을 확인하고 후반 작업을 하는 업체에 양말을 보낸다. 그리고 도매상의 손에 들어가면 우리는 방직에 대한 대가를 받게 된다.
바뀌는 건 없었다.
그렇지만, 직원이 없으니 해야 할 일이 많아졌고, 그런 모든 일을 감당하기에 두 분은 이제 적은 연배가 아니었다.
양말을 만들고, 판매하고, 그렇게 가계의 입출이 되는 동안 나는 내 진로를 찾아갔다.
공장이 정리되었던 시점에 사회생활이 시작되었다.
다시 공장을 시작하던 시점에도 사회생활을 하고 있었다.
일이 좋았다. 내가 가진 좋은 뜻이 선한 영향력으로 전달된다는 생각에 누구보다 열심히 했다. 내가 쌓은 덕이 자녀에게 돌아가는 복이라는 생각도 있었다. 적어도 직장이라는 공간은 나와 가족을 지켜주기 위한 최소한의 방패가 되어주리라는 믿음도 있었다.
아이러니는 일에 충실할수록 가족과 멀어지게 되었고, 일을 빨리 할수록 더 많은 일이 돌아왔다.
아버지께서 수술을 해야 하는 일이 생겼다. 가족 중에서 처음으로 병원에 입원하고, 마취하고, 수술실에 들어가는 일이기에 연차를 쓰려했으나 해야 할 일이 많다는 이유로 쉽게 허락받지 못했다. 물론, 결론적으로는 허락받았으나 내가 해야 하는 일에 의구심을 느끼기 시작했다.
하고 싶어서 시작한 일을 그만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환경에 관여하지 않고도 좋은 뜻이 있고 그것을 이어간다면 어디서든 이룰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조직을 나오게 되었다.
교사로서 10년을 보내며, 아이들에게 학교의 배움을 통해서 많은 것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간다고 이야기하면서 정작 교사 본인에게는 변화의 가능성이 없다면 그것이 모순이라는 생각이 있었다.
그곳을 떠나던 시점에 나의 선택을 말리던 관리자는 결국 떠나도 비슷한 일을 하게 된다고 이야기했었다. 어쩌면, 그 말에 대한 반항심이 다시 학교로 돌아가지는 말아야 한다는 마음의 벽과 같은 역할을 했다.
학교를 나왔다.
아이들과 인사를 나누었고, 함께 오랜 시간 그 공간에서 정을 나누었던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학교라는 공간에 있으면서 인연을 나누었던 많은 사람들과도 안부를 나누었다.
그 길에서 나오고, 그동안 얼마나 많은 것을 잊고 지냈는지 알게 되었다.
수업 준비가 바쁘다는 이유로, 학사 일정에 맞춘다는 이유로, 내가 책임지는 아이들에게 부끄럽지 않겠다는 이유로, 아이들에게는 한 번뿐인 학창 시절이라는 이유로 나의 것을 포기하는 게 당연스럽게 느껴졌던 시간 속에서 내가 잃었던 것을 돌아보게 되었다.
내 일에 회의를 느끼고, 그 길에서 나온다는 결심이 일어나던 시점에 부모님 또한 본인의 연로함을 인지하게 되었다.
내가 일을 그만두겠다고 생각하던 시점에 그분들 또한 지금까지의 일을 그만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좋은 악기라도 그것의 소리를 아는 사람에게 제 값을 받을 수 있다. 소리를 모르는 사람에게 악기의 가치는 그저 소리를 내는 도구일 뿐이다.
기계 또한 같은 맥락이었다.
기계를 다루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고철이었고, 양말이라는 업계가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었기에 이 일을 새롭게 시작하는 사람 또한 많지 않았다.
기계는 고철 값으로 취급되었고, 원자재 또한 그렇게 값을 받을 방법은 없었다.
교육을 통해서 학생들에게 변화할 수 있는 힘을 키우기 위해서 수학을 해야 한다고 했으면서 내가 변하지 못한다는 것은 엄청난 모순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변화에서 도망치지 않기로 생각했다.
어차피 수학을 전공하고 학교에 들어갔고, 무지함 속에서 선배들의 조언에 도움받아서 업무를 배운 것처럼 제조업이라는 다른 분야 또한 충분히 가능하리라는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
그렇게 제조업자가 되었다.
박스를 나르고, 완성된 제품을 배달하고, 기름 묻은 손으로 기계를 분해하고 조립하고를 반복하기도 한다.
공구 골목에서 필요한 부속을 알아보기도 하며 공장 운영에 필요한 방법을 하나하나 배워가고 있다.
일을 배워가며 많은 물음표에 마주해야 했다.
협업과 정보 교환, 그리고 나눔과 배려등의 이상적 가치를 주로 다루는 교육과 달리 대부분의 가정에서 생업의 일부로 적용되는 양말 제조업이라는 분야는 알려지지 않는 부분이 존재한다. 물론, 이 분야에서 오랜 시간 몸 담으셨던 부모님을 의지해야 하지만 부모님의 경험이 이 일의 전부가 아닐 수 있다는 가정도 고려해야 했다.
아직 느낌표를 찾는 것은 아니다.
물론 아직 공장 일에 대한 운전대를 잡은 것도 아니다.
아직은 풋내기이고, 일을 배우는 입장이며, 부모님의 일을 도와드리는 입장이다.
그렇지만 그러한 모든 경험이 배움이 되고 내 안에 유의미함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흔적을 남기려 한다.
빵에 대한 이야기로 자신의 인생과 가치에 대해 이야기 한 어떤 작가의 이야기처럼, 택시를 주제로 자신이 바라보는 삶에 대해 이야기한 작가의 이야기처럼. 나 또한 내가 경험하는 제조업을 중심으로 나의 경험과 통찰을 글로 남겨보려 한다.
바라는 것은 후회와 원망이 없는 글이 이어지기를 바란다. 누군가의 동정을 바라는 글이 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브런치 이전에 블로그에 써 질러둔 나의 글에서 지난 시간에 대한 무거운 감정이 모두 쏟아진 것이 되면 좋겠다.
제조업이라는 분야에 종사했던 사람에게 소소한 공감이 되었으면 좋겠고, 이 길을 걸었던 사람에게 자신의 시간을 돌아보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으며, 이 분야를 생각하는 누군가에게 이해의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으로 글을 이어보려 한다.
유리병에 담겨서 물 위를 떠 다니는 편지처럼, 조심스럽게 누군가에게 전달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글을 뛰워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