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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력하지만 불완전할 가능성 2%

그럼에도 틀릴 수 있다.

by Inclass

제조업장은 도매상의 주문을 받고 양말을 방직한다.

이때 주문 단위는 ‘타’라는 단위로 하는데, 1타는 양말 24짝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보통 우리가 사용하는 말로 표현하자면 12켤레의 양말을 1 타라고 지칭한다.


그렇다고 1타를 제조업자에게 주문하지는 않는다.

양말을 방직하기 위해서 디자인을 입력하고, 그에 맞는 실을 기계에 거치하고, 실의 컨디션에 따라 기계의 디테일을 설정해야 하는데, 1타를 제작해서 도매상에 판매하기에는 수익이 너무 적기에 그런 수고를 즐기는 사람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양말을 주문하는 도매상은 적어도 하나의 디자인으로 50타 이상의 주문을 해야 하는데, 역시나 오직 하나의 디자인을 50타 주문하기보다는 동일한 디자인에 몇 가지 색의 조합에 변형을 줘서 각각의 컬러별로 최소 50타 정도의 주문을 하는 게 그나마 기계를 움직이는 수고를 감수할 만큼의 수익이 만들어진다고 할 수 있다.


양말을 방직하면서 기계가 만든 결과물은 작업장에서 1차적으로 수시로 검사를 하게 된다. 고무의 조임 정도나 사이즈, 양말에 구멍이 난 부분을 점검하는 등 상품 가치가 없는 결과물을 1차적으로 선별한다.


그렇게 모인 결과물을 24짝 단위로 정리해서 1타로 만드는데, 온전히 수작업으로 이루어지는 이 과정에서 2차 검수가 이루어진다.


24짝 단위로 묶인 양말의 박음질 작업, 업계 용어로 스꾸이라고 하는데, 이 과정에서 다시금 양말을 검수한다. 이렇게 3회의 검수가 이루어지고, 이후 자수를 넣고, 가공을 하는 작업이 있는데 이러한 업장을 가지고 일을 진행하는 도매상도 있으며, 일부 생산 공정에서 관련 업체를 소유하거나 아웃소싱을 통해서 완성된 제품을 도매상에게 전달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역시나 다시 검수 작업이 이루어진다고 생각하면 되겠다. 이런 까다로운 검수를 거치고 완성된 양말이 소비자의 손에 들어가는 것이다.


보통 제조업에서는 반복된 검수에도 혹시나 미흡한 결과물이 들어갈 것을 대비하여 2%의 여유분을 완성 제품에 넣거나, 주문 금액에서 2% 수량의 양말 가격을 감하는 방식을 적용하곤 한다.


예를 들어서 100타의 양말을 주문했으면, 그에 대한 2%로 102타를 납품하거나, 또는 주문량 100타를 납품하고 금액을 지불하는 과정에서 100타의 금액을 지불하는 게 아니라 98타의 금액을 지불하는 것이다.


102타를 납품했는데 불량이 0%인 경우 도매상은 102타의 물건을 판매할 수 있으니 유리한 조건이라고 할 수 있으며, 제조업자 입장에서 102타를 납품했으니 혹여 발견하지 못한 불량이 있더라도 2%의 여유가 있으니 제조업자에게도 나쁘지 않은 방법이라고 생각된다.

물론, 제조업자에게 2%의 여유가 있다고 불량을 발견하는 것에 관대해도 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만약 A공장과 B공장이 있는데 A공장의 경우 불량률이 0%이고, B공장의 경우 불량이 2%라고 가정해 보자. 경기가 좋지 않지만 도매상이 한정된 비용으로 생산을 의뢰할 경우 어느 공장에 주문하는 게 이득이라고 할 수 있을까? 당연히 평균 불량률이 적은 A공장을 자신의 거래처로 선택하게 될 것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동일한 비용을 지불하고 이왕이면 양질의 결과물을 더 많이 내 손에 쥐어주는 공장과 거래하게 되는 것이 당연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불량이 항상 2% 이내로 발생한다고 장담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불가능의 확률이 높은 100%의 정확도보다는 어느 정도의 실패의 가능성을 열어두는 2%의 여유가 매력적이라는 생각을 가끔 한다.


100%의 가능성.

누군가에게는 자신감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으나, 누군가에게는 숨 막히는 답답함으로 다가오는 경우가 있다.


상습적인 지각으로 담임 선생님께 꾸중을 듣던 아이를 봤다. 교직 초반이었고, 선배 교사들이 학생들을 어떻게 지도하는지 배운다는 생각으로 눈은 내 모니터를 향하고 있었으나, 귀는 선생님이 학생을 어떻게 지도하는지 듣고 있었다. 좋은 지도는 내가 본받아야 할 부분이고, 그렇지 않은 지도는 무의식 중에 내가 동일한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한다는 생각의 시기였다.


아이를 쥐 잡듯이 잡고 있었다.

도망갈 구멍 없이.


잘못했습니다. 뭐를 잘 못 했는지 아느냐?

계속 지각해서 죄송합니다.

알면서 그러면 되느냐?

아닙니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겠느냐?

지각을 하지 않게 아침에 일찍 일어나겠습니다.

그럼 왜 지금까지는 그러지 않았냐?

앞으로 잘할 거냐?

예.

대답은 그렇게 하지만 앞으로 하지 않을 것 아니냐?


불신과 다그침이 계속되는 대화였고, 자신의 잘못을 이야기하는 아이의 마음이 부서지는 것 같은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담임을 하면서 아이에게 쓴소리를 해야 하는 상황에서 항상 그 장면이 떠올랐다. 그리고 마음으로 항상 생각을 했다. 빈 틈을 줘야겠다고.


알고 틈을 주는 것과 모르고 틈을 주는 것은 다르다.

알고 속는 것과 모르고 속는 것이 다른 것처럼 말이다.


갈등 상황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기려고 한다. 학생을 지도하는 과정 또한 교사와 학생의 미묘한 기의 싸움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기준이 없는 지도이고 학생을 설득하지 못하는 일방적인 지도이며 단순히 교사의 좋지 않은 감정을 표출하는 상황이라면 이후 학생 지도는 교육보다 감정소모로 연결되는 경우가 발생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갈등은 어디서나 발생한다.

미숙한 사람은 갈등에서 자신의 승리를 위해서 감정을 앞세우고, 자신의 권리를 앞세우게 된다. 갈등을 시작으로 감정을 불처럼 키우고 자신의 승리를 불러왔다 하더라도 결국 상처뿐인 승리인 경우를 종종 경험하게 된다.


때로는 패하는 전략도 필요하다.

힘을 빼고 상대에게 승리를 주는 전략이 아니라 상대를 높여주지만 나의 가치가 떨어지지 않는 우아하게 패하는 전략이 필요하다.


알고 지는 것과 모르고 지는 것의 차이처럼, 게임에서 끌려가다가 패하는 것과 게임에서 상대를 적절하게 유도하여 승전고를 울리게 유도하는 것은 분명 다르다.


학생을 지도하는 과정에서 빈틈을 주는 교사였다.

그렇다고 학생들이 나를 무시하지는 않았다.

빈틈을 주는 허락하지만 그것이 잊히는 것은 아니었다. 빈틈이 성장의 기회가 될 수 있도록 유도했고, 긍정적 변화가 있으면 칭찬했다. 그렇지만, 빈틈을 이용하려는 아이들에게는 무서운 사람으로 그려졌다.


빈틈을 허락할 수 있다는 것은 쉬운 사람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오히려 더 많은 것을 기억하고, 더 많은 상황을 포용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이 적어도 교직 생활에서 나쁘게 작용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완벽하려 하지만 완벽하지 못한 2%의 틈은 어디에나 존재할 수 있다.

누군가는 그 2%에 끌려가지만, 누군가는 그 2%로 새로운 가능성을 만들기도 한다.

어쩌면 그런 가능성을 발견하는 안목이 삶에 여유를 찾는 작은 차이는 아닐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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