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후회 없어.
그것만이 내 세상.
그것만이 내 세 상.
아침 청소를 하면서 귀에 이어폰을 꽂고 있으면 유난히 귀에 들어오는 가사가 있다.
처음 듣는 노래도 아니고 오래전부터 들어왔었는데, 내 마음을 흔들고 내 삶을 드라마로 만드는 것 같은 노래이다. 그리고 비슷한 드라마를 살았던 몇몇의 얼굴이 떠오른다.
<노다메 칸타빌레>라는 드라마가 있다.
주인공 노다는 천재적인 피아니스트였다.
곡을 들으면 그 곡을 쉽게 암기하고 건반으로 악보 없이 곡을 표현하고 자신의 리듬과 박자, 강약으로 음악 안에 숨겨진 감성을 전달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렇지만, 어린 시절 천재성은 그녀를 빛나게 하지만 그녀와 함께하는 사람들의 욕심이 그녀를 힘들게 만들었다.
건반 위에서 자유로운 사람.
그 능력 때문에 음악대학에 진학하게 되었지만 모두가 바라는 것처럼 콩쿠르에 입상하고, 유명한 연주자가 되기보다는 유치원 선생님이 되고 싶다는 꿈을 가지고 있다.
다른 남자가 있다.
어린 시절부터 음악가를 꿈꾸고, 유명한 지휘자에게 호감을 느끼고 본인 또한 세계적인 지휘자가 되고 싶은 남자.
음악에 대한 감각이 좋고, 앎이 있으며 유전적 능력도 좋은 사람이지만, 비행기와 배에 대한 트라우마로 뛰어난 실력에도 불구하고 유학을 못 가는 남자 츠카시가 있다.
츠카시는 노다의 능력을 알아본다.
그리고 노다와 시간을 보내는 시간이 많아지며 노다의 과거 트라우마로 그녀가 명연주가로 성장하지 못하는 모습을 안타깝게 생각한다.
노다는 누구보다 뛰어난 연주가의 능력이 있으나 자신만의 세상을 살아간다. 그렇지만, 츠카시가 나타난 이후로 그녀는 자신의 세상에서 벗어나려 한다. 물론, 츠카시 또한 노다로 인해서 자신의 세상에서 조금씩 자유롭게 된다.
그들은 자신들의 세상 속에 살았지만, 조금씩 그 세상에서 자유로워지려고 노력하게 된다.
…
전학생이 왔었다.
사연이 복잡했다.
타지에서 살고 있었으나, 가정의 불화로 전학을 와야 했었고, 할머니의 보살핌으로 학교를 다녀야 하는 아이였다.
아이는 학교를 다니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한 학기만 다녀보라는 아버지의 권유에 결국 전학을 오게 되었고 정말 약속처럼 한 학기만 다니고 자퇴를 하게 되었다.
아이가 학교를 다니는 동안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하루도 빠짐없이 지각했고, 모든 수업시간에 엎드려 잠들어 있었으며, 때문에 교과 선생님과의 갈등에서 담임이라는 이유로 중재를 했어야 했다.
아이가 바라는 것이 궁금했고, 꿈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강압보다는 아이를 이해하고 싶었다.
조금은 마음이 통한다고 생각하던 무렵 어느 날 아이가 가진 불만을 듣게 되었다.
태어나고 싶어서 나온 것도 아닌데, 왜 짐짝처럼 취급하느냐는 것이었다.
부모의 이혼 이후 어머니와 함께 있었으나 한참을 방치당했었다. 반항심에 집에서 나와서 길에서 잠을 청한적도 있었고, ATM기에서 몸을 녹인적도 있었다. 용돈을 벌기 위해서 아르바이트도 했다. 그렇지만, 한 번 집을 나가면 돌아오지 않던 어머니는 무관심했다.
아이의 방치를 알게 된 아버지는 아이를 자신이 양육하겠다고 법적인 다툼을 했다. 그리고 아이는 아비에게 옮겨졌다.
아이의 거취가 옮겨지고 아버지는 타국에서 사업을 시작했다. 물론, 자주 아들을 보기 위해서 귀국을 했지만 그 무렵에 코로나가 시작되었고, 오고 가는 길이 막히게 되었다.
아이는 다시 방치되었다.
방치된 삶 속에서 아이는 전학을 오게 된 것이다.
그리고 방치된 삶 이후에 정해진 시간에 학교에 오고, 하루를 보내고 귀가하는 삶을 살아가는 게 쉽지가 않았으며 무엇보다 그러한 삶의 의미를 아이는 이해하지 못했다.
아이는 자퇴를 했다.
한 학기의 학교생활 이후에 자신이 바라는 것을 하겠다는 약속을 아버지는 지켜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더 이상 아이를 가까이할 수 없으리라는 불안도 있었다.
자퇴가 확정되고 서류가 준비되는 동안도 아이는 연락이 없었다. 잠적해 있었다.
아이의 아버지와 이야기했으며, 할머니와 이야기를 나누었고, 보호자의 자격을 위임받은 고모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이를 원망하지는 않았다. 그것이 그 아이가 바라는 세상이었으니까.
서류가 완성되고 아이에게 전화가 왔다.
할머니댁에 짐을 챙기려 왔다가 생각이 나서 전화를 했다는 것이다. 아이는 아르바이트를 구했고, 자신의 힘으로 먹고 살아가는 문제를 해결하도록 노력하겠노라고 다짐했다. 성공하면 놀러 오겠다는 말과 함께.
학교를 그만두고 집에 오는 길에 아이에게 전화를 했었다. 놀러 와도 내가 없으니, 오기 전에 연락하는 이야기를 핑계로 안부를 물어보고 싶었다.
그렇지만 아이의 전화번호는 바뀌어 있었다.
그 아이는 자신의 세상에서 잘 살아갔으면 하는 생각을 한다.
…
퇴근시간이 되면 교무실에 있는 커피 드립퍼와 주전자 그라인더를 정리했다. 다과를 나누기 위한 공용 용품도 정리했다.
남들보다 조금 일찍 출근했다.
아무도 없는 교무실 문을 열고 들어가는 기분이 좋았고, 이른 시간 학교에 와서 어두운 교실에서 휴대폰을 하는 아이들에게 인사를 하면서 교실에 불을 켜 주는 게 좋았다.
출근길에 교무실에서 커피 향이 나도록 하고 싶었다.
교무실 앞을 지나는 아이들이 향긋한 내음으로 하루를 시작하게 하고 싶었다.
물 끓는 소리와 원두가 그라인더에 갈리는 소리, 드립이 되는 동안 퍼지는 향긋함이 전달되면 복도를 지나는 아이들 몇몇이 커피 향을 칭찬하는 이야기를 하곤 했다. 그 이야기와 함께 서로 즐겁게 인사 나누는 소리가 생동감 있고 좋았다.
초임 교사가 있었다.
당돌한 성격이었고, 외국에서 오래 살아서 그런지 몰라도 자신의 의사를 분명하게 전달하는 사람이었다.
그와 친분이 생기고 어느 날 그 사람이 내게 물었다.
왜 그렇게 살아가냐고.
왜 남을 위해서 커피를 내리고, 왜 남을 위해서 공용 물품을 자진해서 정리하고 왜 그렇게 바쁘고 힘들게 살아가냐고.
돌려서 표현하는 말이었지만,
남들의 감사와 기쁨이라는 말에 심취해서 그들에게 희생당하는 불쌍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의 말을 듣고 오랜 시간 고민도 했었다.
정말 난 왜 그렇게 바쁘게 살아가는 것일까.
나는 왜 그렇게 힘들게 살아가는 것일까.
시간이 지났다.
그리고 그런 바쁨과 힘겨움을 이길 수 있었던 것은 이기에서 오는 불편함 보다는 이타에서 오는 기쁨이 더 크게 다가오기에 감당할 수 있었음을 알게 되었고, 나의 이타는 그들에게 받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주는 행위 하나로 만족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나중에야 이기적 이타주의라는 말을 알게 되었다.
그것이 내가 바라는 세상이었다.
그는 이해하지 못하는 나의 세상이었다.
…
교직에 있었다.
지금은 양말 공장을 하고 있다.
규모가 큰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체계가 잡힌 것도 아니다. 든든한 거래처가 있는 것도 아니다.
이렇게 말 하니 내가 너무 측은하게 보이지만, 그래도 부모님께서는 무일푼에서 시작해서 크게 양말공장을 하셨었고, 규모가 크게 되면서 발생하는 갈등에 피로를 느끼고 사업을 정리했다가 다시 시작하신 것이다.
쉼의 시간 동안 많은 변화가 있었다.
거래처가 없어지고, 유통 구조에 변화가 생겼다.
사업장은 갖추었지만, 예전처럼 운영하는 게 쉽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시간의 흐름은 몸이 이겨내는 힘의 크기에 변화를 주게 되었다. 피로감을 느끼게 되었다.
그러한 이유로 공장을 받게 되었다.
물론, 아직 아는 것은 없다. 부모님의 일을 돕는다는 생각으로 일을 하고 있다.
지인들과 안부를 나누며 근황을 이야기하면 의아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아무래도 내가 평생 교사를 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무엇보다 내가 그 일을 즐기는 것을 그들은 알고 있었으니 말이다.
단순하게 효심으로 이 일을 하겠다고 한 것은 아니다.
물론, 계획이 그저 계획에 머물까 하는 두려움도 있지만, 적어도 이 일을 통해서 하고 싶어 하는 일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조금 더 크다고만 이야기하고 싶다. 물론, 그 일 또한 너무도 가치적인 것이라 누군가에게 말하기는 힘들지만 말이다.
분필을 잡고 아이들에게 미분과 적분을 가르치던 내가 요즈음은 청소기를 들고 아침이면 먼지를 제거하고, 박스를 나르고, 기름 묻은 손으로 기계를 고친다.
흰 셔츠를 베이스로 깔끔한 옷차림을 선호하며 겨울이면 코트를 즐겨 입던 내가 이제는 활동이 편한 옷차림을 선호하게 되었고, 일 하면서 입는 작업복은 가끔 검은 기름때가 튀어있기도 하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삶이고, 나 또한 예상하지 못했으며 아직도 지금의 상황에 적응하고 있는 중이다.
…
하지만 후횐 없지
울며 웃던 모든 꿈
그것만이 내 세상
하지만 후횐 없어
가꿔 왔던 모든 꿈
그것만이 내 세상
그것만이 내 세상
노래는 그렇게 끝이 난다.
그것만이 내 세상.
그러고 보면 우리는 모두 각자의 삶을 살아간다.
그들 각자의 삶에 귀하고 천하고의 차이가 있을까?
울며 웃고, 가꿔 왔단 모든 것이 그들의 세상이 아닐까?
지금 우리가 고민하는 지금이 우리의 세상이 아닐까?
자신의 가치에서 자신의 삶을 만들어가는 것이 진정한 삶을 살아가는 방법이 아닐까 생각한다.
때로는 어떤 관계로 그 삶이 확장되기도 하고, 때로는 어떤 계기로 그 삶이 축소되기도 하지만, 그것 까지도 각자의 삶의 영역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리고 교모의 크기에 관계없이 모두가 의미 있는 삶을 살아간다는 생각을 한다.
나 또한 오늘 내 세상을 만들어간다.
내가 만든 그 세상이 누군가에게 선한 영향을 줄 수도 있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지켜내는 철옹성이 될 수도 있으며, 내가 보호하고 싶어 하는 누군가의 버팀목이 될 수도 있다.
최악의 경우 나만의 작은 세상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결과는 아무도 모른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내 세상이라는 것이다.
타인의 가치와 기준 평가에 휘둘리지 않는 내 세상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그것이 내 세상을 만드는 오늘을 살아가는 기준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