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넘어간 10일
매일 쓰기를 하다가,
어쩌다 하루의 실패로 멈춰 있던 중 계기를 얻어서 다시 도전하게 되었지요.
그리고 그 도전이 10일도 지나지 않아서, 허겁지겁 하루를 보내다가 그냥 넘어갔네요.
반복된 실패.
계획의 차질.
그렇다고 넘어져 있을 수는 없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래도 움직여야지요. 삶은 그런 거니까요. 실패했다고 넘어져 있고, 어렵다고 머물러 있으면 아무것도 바뀌는 건 없으니까요.
요즘 그런 말을 자주 해요.
”문제는 풀어내면 되는 거고 “
단순히 제가 수학을 전공해서 그런 건 아닌 것 같아요.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꼭 정답을 찾을 필요는 없으나 최선을 찾으면 되는 거고, 문제와 어려움이 있어도 어떻게든 그것이 조금씩 지나게 둔다면 결국 끝은 보이는 거니까요.
그렇게 어렵다고 생각하는 문제 앞에서, 위기상황 앞에서 그냥 손 놓고 타인의 도움을 기다리는 게 아니라 방법을 찾고 도전하면서 풀어내면 된다는 생각을 하거든요.
그렇게 자신의 삶을 만든다는 생각을 했어요.
요즘 아이에게 자주 하는 말이 있어요.
저마다 잘하는 게 다르다고.
아빠는 컴퓨터를 잘하고, 아들은 레고를 잘하고, 엄마는 뜨개질을 잘하고, 할아버지는 기계를 잘 고치고, 할머니는 요리를 잘하고, 삼촌은 그림을 잘 그리고, 친구는 게임을 잘하고, 다른 친구는 운동을 잘하고, 누구는 킥보드를 잘 타고.
저마다 잘하는 게 다르다고. 그러니, 네가 그 아이보다 부족한 게 있다고 결코 기죽지 말고, 네가 잘하는 게 있다고 무시하지 말라고 말이지요.
아는 건 가르쳐주면 되는 거고, 모르면 배우면 되는 거고, 저마다 잘하는 건 다르니 그걸 인정하면 된다는 의도의 말을 자주 하고 있어요.
틀린 게 아니라 다른 거니까요.
그 쉬운 말이, 그렇게 익숙한 말이 왜 그렇게 우리의 삶에서 살아있지 못하는 걸까요?
비싼 차를 탄 사람을 보면 주눅 들고, 내가 갖고 싶던 스마트폰을 가진 사람을 보면 주눅 들고, 공부 잘하는 친구를 보면 주눅 들고, 사업채를 운영하는 사장을 보면 주눅 들고, 사회적 지휘를 가진 누군가를 보면 주눅 들고.
그럴 필요가 없는데 말이에요.
저마다 자신의 역량과 능력에 따라서 책임을 다 해야 하는 자리에 있고, 각자가 선호하는 무엇을 위해서 시간과 물질을 사용하고 있는 건데, 많은 사람들은 내가 갖지 않거나 못한 무엇을 가진 누군가를 보면 마음이 쓰이게 됩니다.
틀린 게 아니라 다른 것이라는 말은, 부족한 내 모습이 틀린 게 아니라 그와 다른 가치로 봤다는 의미도 되는데 말이에요.
문득, 그런 주눅들은 모습의 원인이 어쩌면 자신의 모습으로 살아왔던 게 아니라 타인의 관점으로 살아왔기에 스스로의 모습을 상실해서 그런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봤습니다.
역할로 살아가는 삶.
자녀의 역할을 충실하게 행하고, 학생의 역할, 조직원의 역할, 부모의 역할과 같이 말이지요.
자신의 역할을 충실하게 행하려는 노력 속에서 나의 존재보다는 사회나 조직, 때로는 가족이 그에게 요구하는 무엇을 성취하기 위한 노력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상실하게 되었다는 생각을 해 봤습니다.
역할로 살아가는 삶 속에서 자신의 모습, 본인의 이름을 잊게 된 것이지요.
그렇다고 이기적인 삶을 살아가라는 말은 아닙니다.
이기적으로 살아가지 못했다고 우리의 삶이 틀렸다는 말도 아닙니다. 그런 인내를 버텼으니 얼마나 숭고한 삶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충분히 칭찬받을 삶이고, 존경받을 삶이지요.
그렇지만, 우리가 인내하는 삶 안에 자신의 존재 비중을 조금은 넣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속한 조직과, 나의 가족과, 사회가 내게 요구하는 역할 속에서 미시적인 관점으로 나의 임무에만 충실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임무에 충실함으로 얻게 되는 유익과 방향을 생각하여 톱니 같은 부속이 아니라, 유기적이고 능동적으로 개입하는 객체가 되었으면 합니다.
나의 역할이 묻어난 흐름이 최종적으로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는지를 인식하고 최선의 의미를 만들기 위해서 나의 가치에 대해서 생각하고 주체적으로 개입하면, 어쩌면 우리는 역할 속에서 우리의 이름으로 살아가는 방법을 배우는 게 아닐까요?
아마 그런 삶 속에는 조화와 균형도 포함될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역할의 흐름과 방향을 본다는 것, 단순히 종료지점이 아니라 시작부터 종료까지를 보는 눈을 의미하겠지요. 그 말은, 흐름의 시작부터 완료까지를 인식하는 통찰이니, 자연스럽게 나와 연계된 구성원을 인식하게 될 것입니다.
같은 책을 읽어도 다르게 받아들입니다.
비슷한 맥락으로,
같은 일을 해도 누군가는 지혜로운 노인이 되고,
누군가는 꽉 막혀있는 꼰대가 되지요.
같은 일을 해도 누군가는 소통하며
자신의 커뮤니티를 만들지만,
누군가는 자신만의 세상에서,
고립된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어떤 것이 옳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어떤 방향으로 가는지는 생각해야겠지요.
하나 확실한 것은,
나쁜 삶을 목적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의 관점에서 손가락질하는 노인 또한,
그런 삶을 목적으로 살아간 것은 아닐 것입니다.
단지,
역할에 충실하게 살다가,
흐름과 방향을 인지하지 못하고,
나중에 정신을 차리니 어딘지 모를 강의 하류에 표류하고 있었겠지요.
삶에 있어 옳고 그름에 대한 절대적 기준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누구나가 추구하는 삶은 있지요.
하나 확실한 것은,
역할로만 살아간다면,
혹여 운이 좋아 추구하는 삶에 도달하였다 하여도,
그곳에 자신이 존재하지 못하는 경우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이름으로 살아갔으면 합니다.
조화롭고, 의미 있는 그런 이름으로 말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