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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nclass Sep 27. 2024

예민한 어른과 살고 있습니다.

16일

잠들기 전 오늘의 브런치를 위해서 앱을 실행하니 첫 화면에 어떤 작가님의 글 제목을 봤어요.

예민한 사람과 살고 있다는 제목을 보면서 저는 문득 제 부모님이 떠오르더군요.


부모님이 예민하다는 건 사실 잘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냥, 평소에 화가 많고 불만이 많은 사람이라는 생각을 했었어요. 그리고 함께 일을 하면서 그런 추측에 확신이 들었고요.

제겐 아주 힘든 부분이었어요.

저는 가능하면 삶은 둥근 게 좋다는 주의고, 문제는 관점에 따라서 다르다는 생각으로 가능하면 모든 일을 긍정적으로 해석하려 노력하는 사람이거든요.

그렇지만 부모님과 함께 일을 하면서 그게 어렵더라고요.

모든 일에 일단 비판으로 시작하고, 무의식 중에 나오는 부정적 판단과 꼬아서 듣는 태도, 환경에 민감함.


사실 아직도 그렇게 쉽게 수용하기는 힘들지만, 최근 그런 상황을 수용하는 방법에 대해서 연습을 하고 있어요.


그러던 중 알게 되었지요.

부모님의 예민함은 어쩌면 그분들이 삶을 살아오면서 얻게 된 생존의 습관이라는 것을 말이에요.


아버지와 어머니께서는 정말 아무것도 없이 시작하셨어요. 결혼하고 집도 없었고, 누군가의 집을 관리한다는 명목으로 신혼집을 마련하셨다고 하더군요. 일찍 부모를 잃고, 그나마 있는 재산은 형과 누나에게 모두 빼앗기다시피 하고, 잠자리가 없어서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골목길 어딘가에서 눈을 붙이고, 다시 일을 가는 경우가 많았다고 하더라고요.


그런 젊은, 아니 어린 시절을 보내면서 억지로 공부해서 급여가 적은 직장에 취직했지만 그렇게 미래가 밝게 보이지는 않았어요. 먹고 살 정도의 수익으로 안정적인 미래를 꿈꾸는 건 힘들어 보였지요.


그 무렵 바로 위 형의 권유로 공장을 시작하셨어요. 정규적인 급여를 받는 아버지에게 어느 정도의 목돈이 있다고 생각했던 큰아버지께서 권유했었고, 아버지는 이것을 기회로 무엇이 되겠다는 판단을 하셨어요.


화장실 들어가기 전과 후가 다르다고, 언제든 내가 있는 곳이 지옥이고 내가 없는 곳은  천국으로 보이는 것처럼, 아버지 또한 변화는 기회가 된다는 생각을 하셨어요.

그렇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지요.


큰돈을 들여서 기계를 구입하고, 공장을 마련했는데, 저렴하게 구입한 기계는 매번 고장이 나서 멈춰 있었고, 아무것도 생산되지 못했으며, 판로도 없었어요.


부족함은 절박함을 부르고 그것은 새로운 길을 열어주기도 하지만 정작 길을 만드는 사람에게는 엄청난 스트레스와 민감함도 함께 부여하게 되지요. 그도 그럴 것이, 책임은 많고 나가야 하는 길에 믿을만한 사람은 없으니까 말이에요.


아버지 어머니의 삶은 그랬던 것 같아요.

세상이라는 넓은 공간에서 한정적인 정보만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고 분간하며 가야 할 길을 더듬어서 찾아야 했지요. 가족을 지키면서 스스로를 지키면서 말이에요.


그런 삶으로 자녀를 교육시키고, 대학을 보내고, 지금의 환경을 완성하게 되었지요.


언제나 의심해야 했으며, 본인 스스로 판단해야 했어요. 믿을만한 어른이 있었다면 그렇지 않았겠지만, 안타깝게도 아버지께는 그런 어른은 없었던 것 같아요.


자영업을 한다면, 자신의 일을 한다면, 대부분이 그럴 것이라 생각해요. 정말, 거대하고 튼튼한 자신만의 성을 만든 사람이 아니라면 말이에요.


지금은 그래도 인터넷이 있으니까요.

적어도 우리가 구입하려는 물건이 그 값을 하는지에 대해서 사람들의 리뷰도 찾아보고, 후기도 알아볼 수 있지만, 정보가 많이 않았던 과거는 더욱 그러했었고 지금도 그렇게 정보가 노출되지 않은 많은 영역이 있으니까요.


아무리 친한 친구여도 동종업계에서 일을 한다면, 그리고 시장이 그렇게 크지 않다면 경쟁자이기에 마음 놓고 어떤 이야기를 하기도 어렵고요. 아무리 친한 친구여도 그릇이 다르다면 역시나 마음 놓고 이야기 나누기 힘들겠지요.


그런 삶은 무의식에서 발현하는 비판적 시각을 형성하게 되었지요. 가끔, 아니 너무도 자주 그런 비판적 시각이 가족에게도 발현된다는 게 힘들지만, 그럼에도 이해하고 수용해야 할 부분이 되었어요.



게다가 부모님은 민감하세요.

작은 온도 변화에도 추위를 느끼고, 더위를 느끼시지요. 그런 작은 변화로 숙면을 취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고요.


참 별나다고 생각했어요.

어쩜 그런지, 어쩜 그리 무던하지 못한 지.


그런데, 부모님과 일을 하면서 그런 생각을 했어요.

작은 소리의 변화에서 기계의 오작동을 발견하고, 손 끝의 감각으로 실의 탄성을 인지하고, 장력을 느끼고, 손을 조이는 감각으로 상품이 적정 수준에 있는지 여부를 항시 체크하는 일의 방식이 그런 민감함을 얻게 만들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머리카락보다 조금 두꺼운 실을 당겨보고 좋고 나쁨, 실의 균일함을 느껴야 하는 일을 수년간 하셨으니 사람의 감각이 예민하게 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지요.


저는 예민한 부모님과 함께 일을 하고 있어요.

결코 쉬운 게 아니에요.


함께 일하는 사람이 예민하다면, 그리고 그가 온전하게 타인이라면 적어도 제게 선택권은 있으니까요. 그가 다른 일을 하게 하던가, 제가 다른 일을 하는 방식 말이에요. 그렇지만, 함께 일하는 사람이 예민하고 그가 가족이라면, 그리고 특히 부모라는 존재라면 이야기는 더 달라지는 것 같아요. 어떻게든 수용하고 참아야 하지요. 사실 참 답답하고 힘든 일이에요. 호흡의 흐름이 제게 있는 게 아니니까 말이에요.


그렇지만.

무지함을 바탕으로 수용을 강요받기보다는, 이해를 바탕으로 수용하는 게 조금은 마음에 좋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리고 관찰하며 공부하다가 보니 조금은 이전보다 이해하게 되었지요.


공부는 삶의 마찰력이라는 생각을 자주 해요.

배움을 통해서 본능에 더해지는 가속을 조절하게 되지요.


여기서 본능은 내 호흡과 다른 것, 내 호흡을 조절하려는 것에 대한 불신과 미움이라고 생각해요. 그 존재가 부모라는 커다란 벽이라고 할 수 있지요. 본능은 그 벽을 미워하고 거부하게 만들어요. 그것은 본능이기 때문에 수시로 제 마음을 힘들게 하지요. 그런데, 배움이라는 것, 부모의 성향이 그렇게 된 배경을 배우는 과정은 제 본능에 적용하는 관성에 마찰력을 더하게 되지요. 이해하고 수용하게 된다면, 그리고 그 안에서 규칙을 발견하고 그 규칙 안에서 제가 호흡한다면 저 또한 나름의 제 속도를 찾게 되겠지요.


여름의 더위가 힘들어도, 겨울의 추위가 혹독해도, 그런 어려움이 어떤 주기로 내게 오는지, 그리고 어느 정도의 주기로 떠나게 되는지를 깨닫게 된다면 끝없는 고난을 버티는 삶이 아니라 끝이 있는 고난을 잠시 인내하는 삶이 될 수 있으니까요.


저는 예민한 부모님과 일 하고 있어요.

여전히 가끔은 호흡이 힘들어요. 그렇지만 그 호흡이 조금씩 조화롭게 된다는 느낌은 생기는 것 같아요.

그런 생각을 해요.

그 호흡에 제가 적응하게 된다면, 제가 수용할 수 있는 호흡의 범위는 더 많아지겠지요?


그렇다면 제가 수용할 수 있는 사람도 더 많아지겠지요? 결국, 제게 유익이 있는 일이라는 생각을 해 봤어요.


저는 앞으로 큰 세상을 살고 싶어요.

사회적으로 성공하고, 많은 돈을 벌고 그런 것을 바라는 게 아니에요.

하나의 육신에서 한정된 공간에 살아가지만 물리적인 한계를 넘어서 세상의 많은 것을 느껴보는 삶을 살고 싶어요. 그러기 위해서는 제가 수용할 수 있는 게 많아야 하겠지요.

그런 관점에서 저는 여전히 성장하고 있어요.

제 호흡을 조절하면서,

호흡의 조절이 제게 감옥이 아니라

더 자유로운 숨쉬기를 연습하는 과정이라는 믿음과 함께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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