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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nclass Sep 28. 2024

수학 교과서를 버렸어요.

17일

하는 일이 바뀌고 여러 가지가 변했어요. 그중에서 가장 인지하지 못한 게 책장인 것 같아요.


해석학, 위상수학, 수학교육론, 선형대수학, 미적분, 수학 1, 등등.


책장만 봐도 무슨 일을 하는지 알 것 같던 도서목록에 조금씩 다른 책들이 들어오기 시작했지요.

그렇게 야금야금 책장에서 자신의 영역이 늘어나더니, 어느덧 책을 넣어둔 방은 작은 창고처럼 되었어요.

제 일을 위해서 참고자료가 있는 공간이 아니라, 무언가 쌓여있는 공간에 잠시 들어가서 이미 존재하던 그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게 제 일을 살짝 하고 나오는 상황이 되었지요.


하루.

이틀.

바쁘다.

피곤하다.

내일 하자.

답이 나오지 않는다.


한정된 공간에 무엇을 움직일 틈이 없으니 답은 잘 보이지 않고, 그렇게 미루고 있었는데, 그래도 내가 해결을 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리고 고민을 했지요.

어떻게 공간을 만들까?


일단은 지금의 일을 위해서 지금 제가 살아야 하는 방법을 선택했어요. 그리고, 지난 시간을 이제는 조금씩 지우자는 생각을 했어요.


그렇게 시작되었지요.

책장의 책을 버리는 것.


학교에 있으면서 연구용으로 구입한 책들을 버렸고, 수많은 수업에 저와 함께했던 손때 묻은 교과서, 참고서를 버렸어요. 그렇게 공간을 만들고 정리를 시작했지요.


교과서가 빠지고, 문제집이 빠진 책꽂이를 보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어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데?”


생각해 보면, 그렇게 살았거든요.

수학의 정석, 수학의 바이블, 교과서.

학창 시절부터 성인이 되기까지, 성인이 되어서는 다른 누군가의 학창 시절에 함께 등장하는 사람이 되어서 계속 수학이 함께 움직이는 삶을 살았거든요.


마음속에서는 조심스럽게 그런 염려가 있었나 봐요.

이걸 버린다고, 내 과거가 사라지는 것은 아닐까?


그런데, 막상 버리고 나서도 아무런 일이 없었지요.


사람은 그런가 봐요.

보이지 않는 무엇에 스스로를 가두고 살아가지요.

정해지지 않은 규칙을 정의하고, 그 안에 자신을 넣어두고 살아가는 것 같아요.

과거부터 했다는 이유로, 내가 오랜 시간 그것에 무엇을 투자했다는 생각으로.


오랜 시간 함께한 관계가 내게 유익하지 않음을 인지하면서도 그것과 관계를 끊으면 마치 무슨 일이 일어날까 두려워하고 염려하며, 힘들지만 그 관계를 지키려 노력하지요.


시험에 떨어지고, 다시 시험에 응시하고, 다시 떨어지고. 늦었다 생각하지만, 그럼에도 그동안 투자한 시간의 가치를 생각하며 울며 겨자 먹기로 다시 시도하곤 하지요.


내가 그동안 살아왔던 그 길이 아닌 다른 삶을 선택해도 인생은 망하는 게 아닌데, 마치 세상이 끝나고, 나는 인생의 패자라는 생각으로 다른 길을 선택하지 못하지요.


그게 사람의 불완전함이고 나약함인 것 같아요.


언젠가 그랬어요.

그때는 왜 그렇게 삶이 힘들고 제 인생이 불쌍하게 느껴지던지.

하늘을 보며 이 넓은 하늘 아래 혼자라는 단절감이 저를 침몰하게 했고, 마치 실패한 운명이 결정된 사람 같은 생각에 침식되던 그때가 있었어요.

잘한 것보다는 못한 게 더 많이 생각나고, 이룬 것보다는 성취하지 못하는 게 더 눈에 보이던 시기였지요.


그런 무력감과 침몰감에 우울하던 때에,

반강제적으로 모임자리에 갔어요.

그리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문득 깨닫게 되었지요.


제가 저 스스로를 그러한 감정으로 밀어 두고 있었다는 것을 말이에요.


고개만 돌리면 저와 함께 하려는 사람들이 있는데, 저는 의도적으로 그들을 외면하고 좋지 않은 감정의 흐름에 저를 계속 맡기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어요.


물론, 순간의 깨달음으로 이후의 삶이 180도로 바뀌는 드라마는 없었지만, 그 시기를 계기로 조금씩 각도가 바뀌기 시작했지요.


그때부터였던 것 같아요.

다른 길이 있다는 것을 인식하게 된 것은.


오늘.

아니, 아직 덜 끝났으니 어쩌면 내일, 아니면 그 이상의 시간 동안 저는 책장을 비울 것 같아요.

교직을 하면서 많은 기억이 남아있는 흔적들을 하나 둘 치우려 하지요. 그렇다고 제가 바뀌는 건 아닌 것 같아요. 그렇다고 제가 실패한 것도 아니고요.

저는 다른 길을 선택했거든요.

이 길이 나중에 이전의 길과 만나게 될는지는 모르지요. 그렇지만, 지금 선택한 길이 과거의 길과 평행선이라고 정의하지는 않으려고요. 얼마든지, 길은 제가 만들고 선택하며 갈 수 있으니까요.


하나 확실한 것은.

과거를 잊지 못하고, 그것을 버리지 못해서.

존재하지 않는 두려움으로 저를 불편하게 하지는 않으려고요.


좋았던 과거는 그것에 대한 기억으로 남기고, 지금을 살아야지요. 그렇다고 과거의 제가 사라지는 건 아니니까요. 어쩌면, 지금의 나라는 존재는 과거부터 누적된 모든 좋고 나쁨이 누적되어 만들어진 내 모습이니까요.

소유한 것을 버린다고, 제가 사라지는 건 아니니까요.

이제, 빈 공간에 다시 제 모습을 채워야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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