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에겐 아니다.
사회 구성원의 최소 단위는 가정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 가정은 온전히 행복하고, 서로 사랑하고 아끼며 쉼과 충전을 주는 공간이라고 한다.
그렇지만 누군가에게는 그렇지 않다. 그렇지 않은 가정도 생각보다 많다.
자녀의 폭언, 폭행에 노출된 부모,
부모의 폭언과 폭행에 노출된 자녀.
기타 등등.
늦은 저녁 교무실에서 남은 행정처리를 하고 있던 밤이었다.
모니터 넘어 자리에 앉은 선생님께서 아이와 상담을 하고 있었고, 언제나처럼 타인의 말을 듣는 게 그렇게 좋다는 기분은 아니어서 내 일에 집중하고 있었다.
갑자기 어떤 남자의 욕설이 들렸고, 쉼 없이 듣기에도 거북한 욕설이 들렸다. 물론, 작은 소리였지만 그럼에도 그러한 언어 표현에 대한 거부감이 있었기에 더욱 내 집중을 흔들리게 했다.
녹음된 파일이었고, 아이는 아버지에게서 가정폭력을 당하는 아이였으며, 자신을 구해달라고 아버지의 욕설을 몰래 녹음해서 어른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상황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담임 선생님은 해당 사항을 절차에 맞게 진행했고,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이는 아버지와 분리조치를 취하게 되었다.
경찰과 아이를 보호하기 위한 담당자가 아이의 집에 방문했을 때, 아이의 아버지는 야구방망이를 휘두르며 위협을 가했다고 한다. 아이와 아이의 동생들이 그동안 가정에서 폭행당했던 흔적이 발견되었고, 아이들은 모두 시설에서 지내게 되었다.
아버지의 행동은 반성이 아닌, 학교에 대한 민원이었고, 담임교사에 대한 폭언이었으며, 아이의 책과 옷가지를 무책임하게 라면박스에 넣어서 학교로 보낸 게 전부였다.
그런 경험으로 자라난 아이들은 가정이라는 단어, 행복함이라는 단어에 어떤 미래를 상상하게 될까?
…
어린이날이었다.
교직에 있으면서 가정에 너무 소홀했던 내 모습이 싫었고, 교직에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더욱 많은 시간 소홀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기에 학교를 그만두게 되었다. 적어도 내 아이에게는 좋은 부모가 되고자 하는 생각에 말이다.
부모와 일을 하게 되었고, 부모와 일을 하게 되었으니 가정에 대한 일에서는 당연히 우선권이 보호받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렇지만, 몇 년을 일 해도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어린이날이었다.
여전히 나는 출근을 했고,
아이는 할아버지 할머니와 하루를 보냈지만 나는 하루를 온전히 소음이 가득한 기계만 보면서 보내야 했다.
주말이 되어도 기계와 보내야 했고, 휴일이 없이 기계와 보내야 했다.
내 부모의 말은 조금 다르다.
그래도 나 때는 애들만 뒀는데 지금은 애들을 보는 할아버지 할머니가 있으니 얼마나 좋은 거냐고.
글쎄. 그분들에게는 좋은지 모르겠지만.
내겐 그렇지 않다.
휴가도 없이, 아침에 눈 뜨면 공장에 가야 하고, 집에 돌아오면 저녁을 먹고는 남은 시간을 멍하게 보낸다. 그도 그럴 것이 하루 일과에 쉬는 시간이 없으니 피로를 느끼는 내가 이상한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기계 청소하고, 주 6일 일 하면서 휴가와 휴일 없이 공장에서 일하려고 내가 대학원을 나온 건가 하는 자괴감이 들기도 하다.
그렇지만.
부모의 관점은 다르다.
기계는 돌려야 한다. 멈추지 말아야 한다.
정말 답답한 노릇이다.
사람이 어떻게 되더라도 기계는 돌려야 한다는 게 말이다. 그렇다고 보람이라도 있으면 모르겠지만, 청소를 하면 “뭘 그렇게 청소를 열심히 하느냐?”라는 듯 한심하게 생각하고, 그렇다고 청소를 하지 않으면 “청소를 하지 않으니 기계 고장이 많이 있다.”라면서 탓을 돌린다.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하는 건지.
home sweet home.
사실 난 잘 모르겠다.
진짜 달콤한 나의 집인지.
요즘은 잠을 자다가도 아침을 생각하면 심장이 두근거리는 기분이다.
전화기에 부모님 번호만 나와도 심장이 덜컥거리는 기분이다. 가끔은 숨이 막히기도 하고.
이렇게라도 어딘가 풀어내지 않으면 정말 마음이 무너질까 가끔은 겁이 나기도 한다.
하루를 보내며 웃음이 없고, 대화가 없는 삶.
노력하고 노력하고, 바쁘게 움직여도 해야 할 일은 계속 누적되는 삶.
물론 공장 일이 힘든 건 아니다. 그렇게 힘들게 할 일이 아니다.
문제는 그분들의 욕심이지.
기계는 멈춰야 하지 않는다. 기계는 계속 돌아가야 한다.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서 본인들이 노력하면 되는데, 공감하지 못하는 신념에 자녀, 가족이라는 이유로 절대적 희생을 강요하고 있으니 그게 환장할 노릇인 것이다.
마치.
명절 문화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바라는 세대와 살아 있을 때 섬기지 못했으니 돌아가시고라도 큰 상을 차려야 한다면서 산사람에게 주는 상 보다 더욱 고귀한 제사상을 차리는 시부모와의 갈등이라고 해야 할까?
역시나 공감하지 못하는 신념을 강요해서 가족이 힘들게 만드는 경우 말이다. 다음날 아침 6시에 출근하는 사람에게 그럼에도 제사는 12시에 지내야 한다고, 12시에 제사 지내고 설거지 하고 새벽 3시에 귀가시키는 그런 집안들처럼 말이다.
이상한 모순이다.
부모라는 세대, 어른이라는 세대는.
더 좋은 삶을 위해서 자식들에게 그렇게 공부공부 이야기를 하면서,
자식들이 공부해서 좋은 가치를 배우며 성인이 되면 그 가치를 무시한다.
더 좋은 삶을 위해서 공부하라고 하면서,
더 좋은 삶을 살아가려 하면 자신들이 보냈던 수고스러웠던 삶이 부정당하는 것 같아서 본인들의 삶을 강요한다.
일찍 남편을 잃고 두 딸을 대학에 보내고, 멋진 신랑 만나서 결혼까지 시킨 친정 엄마가 사위가 밥을 차린다고 딸아이에게 욕하고 혼내는 어떤 사연의 어른들처럼 말이다. 나는 그렇게 힘들게 살았지만, 두 딸 밥도 잘 차려줬는데, 본인은 직장 생활한다고 신랑 밥도 못 차리는 게으름뱅이라고 나무라다니.
이게 무슨 모순이란 말인가?
내 아들과 딸이 행복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 절대자에게 그렇게 기도하면서, 행복하게 본인이 하고 싶은 싱글 라이프를 살아간다고 측은하게 단정 하는 건 무슨 논리란 말인가? 그들은 나름 자신의 삶을 즐기며 행복하게 살아가는데 왜 자녀의 삶을 스스로 불쌍하고 측은하다고 정의한단 말인가?
행복하기를 바라는 절대자에 대한 기도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인가?
명절이면 가족들이 모여서 좋은 이야기를 나누어야 하는데.
명절이면 공부는 잘하냐, 왜 못하냐, 대학은 어떻게 되었냐? 결혼은 하느냐? 취업은 했느냐?
어쩌면 안타까운 상황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들의 행복의 기준은 좋은 성적, 진학, 결혼, 취업등에 한정되어 있으니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는 것에 말이다.
어떻게 지내냐?
요즘 여행 다니면서 넓은 세상을 배우고 있어요.
라고 하는 말에 손뼉 치며 대단하다고 응원하는 어른이 과연 있을까? 젊을 때 공부해야지 그렇게 여행 다니고 하다가 언제 취업하고 장가가려고?라고 하지 않을까?
삶은.
행복이라 생각한다.
4인 가족이 작은 원룸에 살아도 서로 농담하고 웃고, 즐겁게 지내면 행복한 가정이고, 100평 저택에 살면서 각자가 최고급 수입차를 가지고 있어도 서로 비난하고 욕하고 눈치 보며 살아간다면 행복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글쎄.
아직 내가 덜 자란 사람인지,
아직 내가 너무 이상적인 사람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렇지만 나는 아직은.
웃음이 많이 들리고, 가족들이 서로 농담하고 웃고 즐겁게 지내면서 행복하게 보내는 가정에서 살아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