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고 중간을 쉽게 생각하지는 말아라.
입영 날짜가 나오고 군 입대 전날 밤에 아버지께서는 이야기하셨다.
"중간만 해라. 너무 잘하려 하지 말고."
그 말이 참 싫었다. 한 번뿐인 인생 뜨겁고 열심히 살아야 하는 것 아닐까?
대학 입학과 동시에 내가 꿈꾸던 삶을 자유롭게 배우는 삶이었다.
선배들이 어떤 과목이 점수를 잘 주고, 어떤 교수님의 족보가 있다는 말에는 크게 관여하지 않았다. 듣고 싶은 과목을 들었고, 배우고 싶은 교과를 배웠으며, 학점 따위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동아리를 통해서 단순히 내 영역에서 경험하기 어려운 다양한 활동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렇게 다섯 개의 동아리에 가입을 했다. 요일마다 다른 동아리에 참여했고, 축제 기간에는 3개의 동아리 주막, 부스에 참여하고 2개의 동아리 공연에 참석했다.
많은 동아리를 했지만 공부도 해야 한다는 생각에 남들보다 열심히 살았다. 어디 1학년이 도서관에 자리를 잡느냐는 선배의 말을 무시하고 아침 7시면 도서관에 자리를 잡아서 아침 공부를 하고 수업을 들었고, 동아리 친구들을 만나고, 오후에는 동아리 활동을 했으며, 저녁에는 도서관에서 공부하고 운동까지 마치고 도서관에 갔었다.
그런 삶을 살았던 내게 중간만 하라니. 그 말이 그렇게 싫었다.
우리 집은 기독교 집안이다. 당연히 나는 모태신앙이고, 앞에서 이야기했던 5개의 동아리 중 하나는 기독교 동아리였다. 동아리에서 저녁 10시부터 12시 사이 학교 앞의 교회 하나를 빌려서 자발적으로 와서 자신의 간절함에 대해서 기도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시간이 있었다. 나 또한 마음 맞는 친구들과 그 시간에 교회를 갔었고, 주변 친구에 대한 중보, 가족에 대한 중보, 내 안의 고민에 대해서 기도하고 친구들과 함께 집으로 돌아가곤 했었다.
입대를 앞두고 있던 그 무렵, 나의 기도는 그러했다.
이왕이면 최전방에 가면 좋겠다고. 이왕이면 교회도 없는 산골에 가서 종교활동을 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이왕이면 훈련도 힘들게 했으면 좋겠다고. 그래서, 전역 이후에 어떤 힘겨움이 오더라도 이겨내는 인내를 배우면 좋겠다고 기도 했다.
그런 기도로 하루하루를 채우며, 입대를 준비하던 내게 중간만 하라니. 그래서 더 싫었던 것 같았다.
훈련소에서 숫자를 조금 쓰는 사람 손 들어 보라고 했다.
이왕이면 이것저것 해 보자는 생각에 손을 들었고, 훈련병의 가슴에 붙이는 주기표를 만드는 임무를 담당하게 되었다. OO-001부터 OO-160번인가? 정확하게 기억나지는 않지만, 컴퓨터로 출력하면 눈 깜짝할 사이에 끝 나는 일을 손글씨로 쓰기 시작했고, 각각의 번호별로 동일한 명찰 같은 용지를 다섯 장씩 만들었다.
이왕이면 도전한다는 생각에 그런 삽질 아닌 삽질을 하게 되었다.
자대 배치를 받았다.
우리나라 동쪽의 가장 북쪽에 위치한 부대였다. 부내 안에 교회가 있었는데, 입대 직전 태풍으로 산사태가 생기면서 교회 한쪽 벽이 토사에 함몰되었고 그렇게 부대 안에서 교회가 없어진 상황이었다. 게다가 입대 후 내가 있던 부대는 전방으로 들어가게 되어 종교행사가 거의 불가능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왕이면 힘들게 사는 게 좋겠다는 마음이 정말로 그런 환경을 만들었던 것 같다.
군 생활에서도 적극성을 보이려 노력했다.
그러다 보니 일 좋아하는 상급자들의 눈에 들어가게 되었고, 여러 일에 불려 다니기 시작했다.
상담병을 하고, 환경미화를 주도했고, 행정보급관의 오른팔 같은 존재가 되었으며, 군종병을 하게 되었다. 분대장이며 계산병이며 등등의 기본 임무를 하면서 추가로 받게 된 것이다.
후회하지는 않는다. 당시에 배우고 경험한 많은 일이 이후 내 삶에 긍정적 영향을 줬던 것은 사실이니까.
그렇게 열심히 살아가다가 어느 날 문득 깨닫게 되었다.
나는 쉬는 방법을 몰랐다. 여유를 즐기는 방법, 아니, 나 자신에게 조금은 집중하고, 내 안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방법을 몰랐던 것 같다. 그리고 문득, 중간만 하라던 아버지의 말씀이 생각났다.
중간만 해라.
그렇게 싫었던 말이 어느 날 내 머리에 큰 종을 울리게 된 것은 너무도 어처구니없는 수학적 원리에서였다.
중간값.
통계에서 평균값과 같이 표본의 특징을 나타내는 다양한 표현들이 있는데 그중에서 중간값이라는 용어가 있다. 말 그대로 여러 표본 중에서 정말 중간에 위치한 값을 이야기한다. 여기서 중간의 위치를 정확하게 표현하기 위해서는 가장 큰 값과 가장 작은 값을 기준으로 하나하나씩 폭을 좁히는 것이다. 그렇게 위에서부터 아래로 하나씩, 아래에서부터 위로 하나씩 폭을 좁히다 보면 만나는 점에 있는 값을 중간값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런 사실적 지식은 중간을 위해서는 최고와 최저를 알아야 진정한 중간을 할 수 있음을 깨닫게 된 것이다.
중간만 해라는 말은, 어느 정도 느슨 느슨하게 해라의 개념보다는 최고를 찍어보고, 최저도 찍어보면서 중간의 위치를 가늠하는 능력을 의미했던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은연중에 사회의 많은 영역에서 최고를 강요하는 모습을 목격하게 된다.
그리고 최저점에 있는 누군가를 측은하게 보는 시선 또한 목격하게 된다.
최고가 영원하지 않은 것처럼, 최저 또한 영원하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삶의 고저가 있다는 누군가의 말처럼, 최고와 최저는 누구에게나 오르내림 할 것이며 그 과정에서 중간을 명확하게 인지하여 중심을 잡고 안정된 삶에 대한 지혜를 배워갈 필요를 느끼게 된 것이다.
중간만 해라.
그렇다고 그것이 네 삶을 나태하게 살아도 된다는 당위의 표현은 아니다.
중간만 해라.
그러기 위해서 최고를 알고, 최저를 알아가며, 중간의 무게를 깨닫고 그 범위 안에서 안정된 삶을 자신이 조절할 수 있는 것이 진정한 "중간"의 삶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