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소금기둥이 될 수도...
스마트폰으로 사진 찍는 게 쉬운 요즈음이다.
그렇지만, 스마트폰에 카메라 기능이 들어가기 전에는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적어도, 내가 대학에 입학했던 그 시절까지는 말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많은 시간이 지났고 바쁜 삶을 살아서 그런지 모르지만, 과거 기억의 일부가 지워지는 경우가 있다. 알츠하이머는 아니다. 누구나 그런 경험이 있지 않을까? 오래된 친구와 추억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상대의 이야기에 "정말? 그랬었다고?"라는 말로 그와 내가 함께 했던 사건이 내 기억에서는 삭제된 일 말이다.
특별한 몇몇의 사건만이 떠오르는 기억의 선을 따르다 보면 가끔은 어제의 나와 지난주의 나에 대한 기억이 과연 실존했던 것인가에 대한 의문을 갖게 된다. 그런 기억이 이어지다 보면 때로는 중학교, 고등학교 시절 과거의 내 모습이 어쩌면 내 기억이 만들어낸 환상이 아닐까에 대한 의심도 하게 된다. 그렇지 않을까? 그 기억을 공유하는 사람도 없으며, 그 기억에 대한 사진도 없고, 오직 내 기억이라는 하나의 단서만 있으니 말이다.
어느덧 중년을 바라보는 선배들과의 술자리가 있었다.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인연의 시작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고 그 시절의 좋았던 추억을 나누었으며,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그로부터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 대한 이야기로 연결되었다.
가족이 생겼고, 여기저기 아픈 곳이 생겨났고, 나이를 먹은 모습이 서로에게 보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문득, 누군가가 그런 이야기를 했다.
"뒤 돌아보면 돌이 된다."
모두가 과거의 추억을 이야기 나누며 그때를 그리워하고 있을 때, 그는 우리의 추억이 너무 길어져서 지금의 모습을 생각하지 못하면, 그리고 우리의 미래를 준비하지 못하면 우리는 그대로 멈춰버리게 된다는 이야기를 했다. 지혜로운 이야기라며 웃고 잔을 부딪치고 이야기의 주제는 바뀌었지만, 그 말이 기억에 오래 남았다.
소돔과 고모라.
성경에서 죄가 많은 마을 사람들을 벌하기 위해서 천사가 왔고, 그들을 모두 멸하려 하는 천사에게 호의를 베푼 롯은 천사로부터 마을을 떠나라고 경고를 받게 된다. 그리고 그날 밤, 천사가 마을을 멸망시키기 전 롯의 가족은 마을을 탈출했으나 마을에 두고 온 재산을 아쉬워한 롯의 아내가 뒤를 돌아보다가 소금기둥이 되었다고 한다.
뒤 돌아보면 돌이 된다는 말은 성경에서의 이야기 뒤 돌아봐서 소금기둥이 된 롯의 아내에 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생각보다 뒤를 돌아보며 돌이 된 사람은 많이 있다.
누군가에 대한 원망, 분노, 미움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사람이 그러하다. 그들은 그들의 부정적 감정에 사로잡혀서 그곳을 벗어나지 못하고,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을 선택하기보다는 과거의 어두움을 응시하며 그곳을 향해서 욕하고, 원망하며, 눈물 흘리고 있다.
물론, 그곳을 벗어나는 게 쉬운 것은 아니다.
상실의 고통이라면 더욱 그러할 것이다.
김영하 작가의 단편집 <오직 두 사람>에는 주말에 마트에 갔다가 하나뿐인 아이를 잃어버린 부모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아이를 잃은 부모의 슬픔으로 부모는 직장을 잃게 되고, 아이를 찾는 것에 모든 삶을 받친다. 아비는 매일마다 전단지를 돌리고, 어미는 미쳐버렸다. 사실, 상상도 하고 싶지 않은 삶이다.
자녀가 없었던 나로서는 안타까움이었지만, 함께 살아가는 자녀가 있는 나로서는 감히 그 고통을 상상도 못 하겠다. 과연, 그들과 같은 상황에서 나는 살아갈 수 있을까?
싸이의 노래 중에 아름다운 이별 2라는 노래가 있다.
"이 와중에 배가 고프니 미쳤나 보다. 이별하고 나도 그래도 배고프다고 밥 먹는 걸 보니 나도 사람인가 보다."
아무리 큰 고통이 있어도 사람은 배가 고프면 음식을 먹고, 졸리면 잠들게 되어 있다. 그렇지만, <오직 두 사람>에서 보여주는 정도의 상실 앞에서도 과연 그런 본능이 나올는지는 잘 모르겠다. 오히려 이유리 작가의 연작소설 <좋은 곳에서 만나요>에서 나오는 아이를 잃은 두 부모의 이야기처럼 살아 있어도 살아있지 않은 삶을 살아가지 않을까 두렵기까지 하다.
이렇게까지 마음이 무거운 상실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 했던 건 아닌데, 너무 흐름 없이 글을 쓰다 보니 너무 멀이 온 것 같다.
조심스럽게, 감당할 수 있는 고통이 내게 주어지는 것에 감사하게 된다.
그리고 감당할 수 있는 고통이 내게 주어질 것을 바라게 된다.
그 고통을 감당하기 위해서 계속 앞을 보는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 그런 고통을 감당하며, 이겨내는 가운데 얻는 기쁨이 내 삶을 풍족하게 채우면 좋겠다. 그래서 내 삶이 더욱 생동감 넘치게 채워지면 좋겠고, 때문에 뒤 돌아보는 틈이 생기지 않고 그래서 돌이 되지 않으면 좋겠다.
뒤 돌아보면 돌이 된다.
어쩌면,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 앞에서 우리는 뒤돌아보게 되는 것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