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세가 데미안을 마흔쯤에 썼다고 한다.
내 마흔은 아이가 세 살이던 시절이라 하루하루가 정신 없었다.
그 나이에 누군가는 책을 쓰고, 나는 겨우 하루를 버텼다.
그래서인지 데미안이라는 책이 더 어렵게 느껴졌다.
다 읽는 데 다섯 달이나 걸렸다.
그래도 몇 문장은 오래 남아 있다.
예를 들면,
“누구나 이런 어려움을 겪는다. 인생의 분기점이다.
삶의 요구가 가장 혹심하게 주변 세계와 충돌하는 지점—
앞으로 가는 길이 가장 혹독한 투쟁으로 쟁취되어야 하는 지점이다.”
읽으면서 ‘알에서 깨어난다’는 말도 많이 떠올랐다.
솔직히 인생이 늘 그런 느낌이다.
깨지고 나오라고 하는데,
깨져 나오면 또 춥고, 아프고, 막막하다.
그리고 내가 가장 좋아하는 구절은 이거다.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우리 어머니한테 에바 부인이라고 말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
20대의 나는 ‘뽁’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그 별명이 좋았다.
어렵고 조금 촌스러운 내 이름 대신,
더 단순하고 사랑스러운 소리로 나를 불러주는 느낌이 있었다.
그때의 나는 그런 식으로 누군가에게 사랑스럽게 불리며 살아도
괜찮다고, 그래도 된다고 믿고 있었다.
지금의 나는 다른 이름으로 살고 있다.
알에서 나온 건지, 알이 깨져서 밀려 나온 건지 잘 모르겠다.
가난했던 시절, 지하방이나 옥탑방 같은 곳에서
돈 없으면 굶고, 라면으로 버티던 그때도
돌이켜보면 일종의 알 속이었을지 모른다.
헤세는 또 이렇게 말했다.
“당신의 운명은 당신을 사랑하는 데요.
언젠가 그것은 완전히 당신 것이 될 거예요.
당신이 꿈꾼 대로요. 당신이 변함없이 충실하면요.”
마흔 후반의 나는
이 문장을 예전보다 느리게 읽게 된다.
퇴근하고 돌아와 짬 내서 공부하고,
귀찮아서 건너뛸 때도 있고,
머리가 잘 따라주지 않아도 다시 시작한다.
대단한 이유는 없다.
그냥 내 인생을 포기하지 않고 싶어서.
내가 나에게 조금 더 충실하면,
언젠가 내가 원하는 장면에 닿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
그 정도면 된다.
지금은 그 정도면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