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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만총총 Oct 10. 2021

서른둘, 성희롱 신고도 못하나요

갓 서른을 넘기고  해가 지났지만 변한 게 없다 20살 때 처음 서울에 올라와 살았던 옥탑방에서 라면을 끓여먹던 생활을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굶주림에 쫓겨 서른이 우울하거나 나 혹은 인생에 대해 고민해볼 여유도 없 그저 쌀이 떨어지지 않기를 바랄 뿐, 김광석에 서른쯤 가사는 다음 달 월세를 걱정해야 하는 내게 사치다. 서울 생활은 숨만 쉬어도 돈이 든다.


편집디자이너 쪽은 월급이 박한 반면, 일도 많고 야근도 자주 한다. 게으른 나로서 견디기 힘들어 겨우 겨우 버티다 통장에 백만 원이 쌓이면 회사를 그만 다. 그러다 통장 잔고가 0원이 되면  일을 시작한 어쩌면 흙수저인 내가 옥탑방을 벗어나지 못한 진짜 이유일 것이다.


여의도 잡지 회사는 면접을 회사 건물 1층 커피숍에서 진행했다. 사무실 공간이 비좁고 공사 중이라 사무실에서 면접 진행이 어렵다는 사장의 말을 곧이 곧 대로 믿는다. 그의 말이 거짓이라도 나쁠 것은 없다 단지, 낡은 커피숍 빨간 소파에 앉아 쌍화차를 후루룩 쩝쩝대는 의 혓바닥 소리가 귀에 거슬린다.


시골에서 서울로 올라와 오로지 혼자 버틴 나로서는 깡으로 결핍과 가난이겨냈혼자 사는 작은 원룸에는 라면과 김치뿐이다. 나는 뺏길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누굴 의심할 이유도 없다  남자 사장과 커피숍에서 면접이 어색하긴 지만, 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어차피 그가 특별한 요구를 하더라도 거절하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의심보다는 당장의 월세와 생활비가 저다.


출근하고 일주일 후, 사장은 밤 9시에 전화를 하며 지방 출장을 가야 하니 동행할 수 있냐고 연락을 해왔다. 여직원과 단둘이 지방 출장은 무슨 의미일까? 편집기자와 편집디자이너를 병행하는 일이라 재미있을 것 같아 지원했더니 지방 출장을  같이 다녀야 한다는 사장이 미쳤다


'그만둘까'


아니면


'한번 다녀올까 방을 따로 잡겠지'


거친 숨소리를 내쉬며 애타게 대답을 기다리고 있다 뇌에서 시답잖은 고민을 하고 있으니 등뼈를 따라 뻗어 있는 척수가 정신줄 놓고 있는 뇌를 대신해 명령을 내렸다


'못 갑니다'


 나의 거절에 순순히 알겠다고 대답한 사장은 전화를 끊는다.



어렸을 때부터 남자들은 나를 쉽게 생각했었다. 작은 오빠의 남자 후배가 동전 오백 원을 보이며 집에 같이 가면 주겠다고 했었다. 싫다고 대답하자 과자를 잔뜩 사주겠다며 다시 설득했었다. 어렸을 때는 삐쩍 마르기도 했고 금전욕과 식욕이 별로 없던 나는 돈과 과자에 현혹되지 않았었다. 주머니에 동전 하나도 없던 나는 오백 원으로 나를 꼬시는 그 남자가 우습게 생각했었다.


그러다 몇 달 뒤, 친구 집에 놀러 가서는 속절없이 당했었다. 친구 오빠가 9살인 에게 이불 안에 들어가서 잠자기 놀이를 하자며 설득했었다. 20살 가까운 남자의 제안에 단호하게 나는 "싫다"라고 했지만 친구의 설득에 결국 이불을 덮고 말았었다. 이미 짜인 계획처럼 음산한 친구 오빠의 손이 내 팬티 속으로 들어왔었다.


 '악 '


나는 소리를 지르고 나서야 이불을 박차고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중학교에 올라가서는 농구선수 출신인 체육선생님이 음흉한 눈빛으로 나를 빈 교실로 불렀다. 그리고 190이 넘는 큰 키와 굵은 손으로 내 어깨를 잡고 벽으로 세차게 밀어붙이며 뽀뽀를 할 것처럼 그의 얼굴을 들이밀었다. 다행히 그 순간 친구들이 들어와 별일 없었다.


20살이 되고 난 이후에는 전철에서 수도 없이 남자의 손길을 강제로 맛봤다. 정말 노인이나 젊은 남자 할 것 없이 어찌 그리 내 허벅지를 좋아하는지 알 길이 없었다. 알바를 겨우 끝내고 12시 막차를 타고 골목길을 걸을 땐 나도 모르게 뒤쫓아 오던 남자가 납치를 시도했었다. 나는 소리를 지르고 그의 손길을 벗어나 뛰었다. 다행히 50미터 앞에 아저씨들이 편의점에서 술을 마시고 있어 그 남자는 더 이상 나를 뒤쫓지 않았었다.


그렇게 많은 사건 사고를 거치고 서른이 되고 나서는 나에게 관심을 갖는 남자도 지하철 치한도 뚝 끊겼다. 치한들도 서른 나이를 아는 건지 세상이 조금씩 바뀐 건지,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어린 남자나 늙은 남자나 20대 여자를 선호한다는 말이 있다는데 진실일까?


하지만, 늘 그렇듯 치마만 두르면 정신을 못 차리는 별종들이 있다. 아주 가까운 곳, 취업한 지 한 달도 안된 시사잡지 사장이 그러했다. 사장이자 편집장이던 남자 사람은 수시로 나에게 지방 출장을 가자며 졸라댔다 출장이 성사가 안되면 맛있는 점심을 사주겠다며 야외로 데려 나가고 싶어 했다 그 남자의 맛집 리스트 식당은 꼭 모텔을 끼고 있다. 사장은 모텔 방문이 안되자 이번엔 맛집 제안을 하는 대신 다른 계획을 세웠다 아무도 없는 사무실에서 나를 구석으로 몰아 얼굴을 들이댄다거나, 손을 잡거나 어깨를 주무르며 즐거워했다.


"싫습니다"


월급은 받아야 했고 일이 좋아서 직장을 그만두고 싶지 않았지만 할 말은 했다. 사장은 모든 행동을 멈추고 여직원을 뽑았그의 성추행은 다른 여직원을 향했다 나는 그 와중에 그런 꼴을 못 보고 사장에게 말했다.


"성희롱 벌금이 2천만 원 된다죠?"


이 말을 내뱉은 몇 주 뒤, 회사에서 쫓겨났다. 억울했던 나는 직장 내 성희롱 상담센터에 전화했다.


"제가 직장 내 성희롱을 당했는데요 고소하고 싶어서요."


아무것도 모르지만 당당하게 물었다 나는 죄인이 아니라 부끄러울 게 없다 억울함이 먼저다.


"정말 안타깝네요. 혹시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서른두 살이요."


상담원은 처음 성희롱 발언에 속상해하더니 나이를  밝히자 기가 차다는 듯한 말투로 서른두 살이 됐으면 크게 문제로 삼지 못할 것 같다 그렇지만 정말  원하시면 접수는 해주겠다고 했다 서른두 살이면 여자도 아니란 말인가 허탈하게 전화를 끊고 서른에 대해 곱씹는다


'서른, 그렇게 많은 나이인가'


잡지 회사를 떠나고 집에 있는데 같이 일했던 남자 직원이 원하지도 않는 소식을 전했다 나와 동갑인 새 여직원이 나와 고향이 같은데 아는 사람 아니냐고 묻더니 결국 그가 전화한 이유를 말했다 새로 들어온 여직원 월급이 매달 5백만 원으로 늘었다고 전해준다 사장과 해외출장을 다녀온 뒤부터라고 남자인 자신은 억울하다며 하소연했다. 사장의 성희롱에 귀 막고 입 다물던 그 남자 한풀이를 들어야 한다니 어이없었지만 대충 '그렇군요'라고 대답하고 전화를 끊고 번호를 차단했다.


'잘했어'


10년전 내게 칭찬해주고 싶다 그리고 후회는 없다 나는 눈앞에 돈보다 내 삶을 선택한 것이다 그리고 나와 비슷한 신념을 갖고 불철주야 일을 하며  고생하는 그녀들을 응원한다 서른이 되고 육십을 넘어 꺾기는 세대가 돼도 당신은 꽃처럼 여전히 아름답고 소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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