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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만총총 Jul 07. 2021

이별이 떠났다

“실연을 당한 후 달리기를 시작했다. 한참을 정신없이 달리다 보면 땀이 흐른다. 수분이 다 빠져나가 버리면 눈물이 나오지 않을 거라 믿기 때문이다.” 1994년에 나온 영화 ‘중경삼림’에서 배우 금성무의 배역 ‘경찰 223’의 독백이다. 

     

첫사랑에 실패했을 때, '중경삼림'을 보고 나서 개천 길을 걸었다. 운동을 싫어하는 나는 달리는 대신 걷는다. 한두 시간 걷다 보면 몸안의 수분이 빠져나가 눈물이 나오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그렇게 이별도 쉽게 잊히기를 바랐다. 걷기를 선택해서일까? 땀은 흐르지 않고 미움만 남은 채 이별의 심정은 온전히 머릿속에 남았다. 집에 돌아온 나는 텅 빈 방 안에서 울고 있다. 실패다. 감정의 절제가 뜻대로 되지 않음을 알고 한참을 걷지 않았다. 모든 게 무의미했다. 그러다 문득 기도를 하면 나아질 거라 생각해 새벽마다 교회에 가서 무릎 꿇고 기도했다. 고통을 잊을 수 있기를 소망했지만 생각만큼 잊히지 않고 괴로운 기분은 나를 떠나지 않았다.

      

옥탑방 구석에서 매일 밤마다 이별의 짐을 꽁꽁 안고 있던 내게 좋은 기회가 왔다. 외국에서 일할 수 있는 찬스가 주어져 미련 없이 한국을 떠나 호주에 도착했다. 호주는 연말에는 2주간 긴 휴가가 준다.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를 인상 깊게 봐왔던 나는 겨울 휴가 기간에 울루루 하이킹 패키지를 선택했다. 호주 에어프랑스 울루루에는 영화에 나왔던 세상의 중심을 알려주는 아주 큰 바위가 있다. 


외국인 패키지 버스 여행은 조금 달랐다. 이동을 하면서도 여행객들이 많이 걷도록 한다. 한국에서처럼 버스에 내려서 사진을 후딱 찍고 바로 버스로 올라타 다음 장소로 이동하는 대신, 호주에서는 2~3시간을 지정된 장소에서 여유롭게 지낼 수 있도록 한다. 움직이지 않은 버스를 뒤로하고 반강제로 바위 주위를 걷는다. 원주민 족장은 울루루에 있는 신성한 바위에 대해 설명했다. 병을 낫게 한다던가, 아이를 임심 할 수 있게 해 준다는 등의 여러 말들을 나열하며 절대 사진을 찍거나 돌을 가져가면 안 된다고 했다. 저주에 걸릴 수 있다고 그늘진 표정에는 진심이 보였고 단호한 말투로 경고했다. 하지만 검은 피부를 가진 원주민을 무시했던 흰 피부의 백인 여행객은 사진을 찍었다. 인종 차별인 것도 있겠지만, 대체적으로 남의 말을 무시하는 사람들은 세계 어디서나 있는 것 같다. 외국 사람이라고 해서 바르고 올바른 다른 사람을 존중하고 합리적이라고 생각한 ‘사대주의’ 적인 나의 관점을 깨트려 줬다. 사람 사는 거 다 똑같다.      


나는 원주민 족장의 눈빛에서 진실을 봤다. 분명 이 큰 바위는 7년 동안 떨쳐내지 못한 불편한 감정을 해소해 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누군가는 흘러 보내버릴 것 같은 족장의 말이 내 가슴에 콕 박힌다. 다부진 마음으로 두 발에 힘을 주며 바위 주위를 걷기 시작했다. 지난 애증의 감정을 털어 내고 밤마다 한숨 쉬며 자책하는 어리석은 행동을 끝내고 싶다. 뜨거운 열기 아래서도 여전히 땀이 나지 않는다. 페트병에 먹다 남은 물을 말라버린 눈물 대신 바위 주변에 뿌린다. 몹시 원통하고 답답한 감정을 떨쳐 내련다. 미리 계획한 행동은 아니다. 뜨거운 열기 속 사막에 우뚝 서있는 바위도 목이 몹시 마를 것 같았다. 바위의 갈증을 풀어주면 내 소원은 꼭 들어줄 거라고 되지도 않는 확신을 했다.   


나의 작은 행위가 통한 것일까?     


이별이 떠났다.     


지독한 첫사랑의 통증은 사라지고 결국 그의 선택을 이해하기로 했다. 이별의 치유는 꽤 비싼 편이다. 사랑뿐 아니라 아픔을 이겨 내려면 어떤 의식이 필요한 것 같다. 제사를 지낸다던가, 굿을 한다던가, 행동적 실천은 마음의 변화를 일으켜 삶을 견뎌낼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 같다. 


남은 '생'을 지켜주는 버팀 몫이 될 수도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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