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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디 공책 Dec 16. 2018

네게 손을 내민다

옆자리 김동식 군을 응원한다

  TV에 스마트폰에 국위선양의 대표격인 사람들이 나왔다. 액정에 비친 그들의 늠름한 모습 앞에서 기계도 아닌 것이 반자동으로 응원단의 새맴버가 되었다. 그러던 어느날 우연히(이퀼리브리엄의 존 프레스톤처럼) 액정 속 이들의 승리에, 방방뛰는 옆사람을 보게되었다. 뭐가 저렇게 즐거울까.


  뭐라 선뜻 말할 수 없는 불쾌감을 느꼈다. 당장 본인과 직접적인 이해관계에 있는 사람들도 아닌데 덕분에 즐거웠다는 둥 말하는 것이 이상했다. 옆자리 김동식 군의 일에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는데 말이다. 그리하여 애써 탓할 거리를 찾았다.


  이게 다 국위선양[國威宣揚] 탓이다.


  응원의 여부는 브라운관 밖의 사람들 안에서만 국한되지 않았다. 브라운관 안에서도 국위선양이라는 타이틀이 없던 것도 있게 만들었고 있던 것도 없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국위선양의 괄목할만한 근거인 메달의 여부에 따라 사람들의 태도와 생각이 달라지는 것도 족히 보았다.


  애초에 국위선양이라는 개념은 뭘까.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라지만 확실한 사실 한 가지는 알고 있다. 인간에게 제일 중요한 것은 개인의 개성을 꽃피우는 것이다. 그래서 바보는 국위선양과, 자아실현을 추구하는 것이 어떤 관계에 있는지 모른다.


  나라의 권위나 위세를 널리 떨치게 하는 것이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일이라고 말한다면 국위선양이라는 개념은 국가주의의 새끼일 것이다. 분명 바보는 국가를 잃어본 적이 없다. 난민들의 고통도, 패전국의 설움도 모른다. 다만 개인의 개성을 억압하고, 하나가 전체를 위해 희생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되는 나라에서부터 부패한 권력자와 애처로운 스스로가 발생한다는 사실은 안다.


  고로 바보는 옆자리 김동식 군을 응원하기로 생각했다. 옆자리 김동식 군을 응원하지 못할 바에야 국위선양한다고 치켜세우는 이들을 응원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딸랑거리는 종소리에 침을 흘리는 개처럼 암묵적인 훈련 속에 살아가는 기계가 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말이다. 이것이 어제의 오늘의 결론이었다.


옆자리 김동식 군에게 손을 내밀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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