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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디 공책 Mar 24. 2018

조깅과 망상과 그들의 카르텔

쉽지 않은 소년과 생각들

  치에 나왔다. 신달역 근방 놀이터에서 주운 나키 운동화를 신고 카트만두 뒷골목에서 흥정했던 야크 디자인의 박스 티셔츠에 맨스필드 체리 농장에서 발견한 이탈리 트레이닝팬츠. 그리고 양구의 군인 우대 옷가게에서 떨이로 산 아디다 후드집업을 걸치고 무작정 달려서 도착한 곳이었다. 미세먼지  덩어리인지 서늘한 바람인지 뭔 줄 모를 차가움은 얼굴을 밀쳤다. 귀에 꽂은 에이팟을 가볍게 두 번 두드리자 감비노의 익숙한 비트가 달팽이관을 두르렸다. 잠시 가쁜 숨을 고르고 둔치의 트랙(650m)을 달리기 시작했다.


  한 바퀴. 머리가 어질하다. 조금 전까지 카베 자헤디 감독의 'I Am A Sex Addict'를 보고 나온 터라 성중독에 관한 감독의 진솔한 고백이 여운으로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영화의 말미, 카베 자헤디는 자신이 겪었던 성중독을 세이레네스의 소리에 매혹당한 선원들의 이야기로 비유했다. 후회할 것을 알면서도 듣게 되는 마성의 소리로 말이다. 하지만 그는 아르고호 원정대의 오르페우스를 찾았노라고 단언했다. 성중독자들로 이루어진 공감의 공동체와 진정한 사랑은 오르페우스가 연주하는 리라가 되어 마성의 소리를 청아한 소리로 상쇄했다는 것이었다. 몇 번의 결혼을 뒤로하고 마지막이 될 결혼식을 올리던 그의 두 눈에는 눈물이 흘렀고 가물 때로 가문 나님의 가슴을 적셨다.


  두 바퀴. 평소보다 빠른 패턴으로 폐에 차오르는 공기 때문인지 가슴에 통증이 느껴진다. 흡연을 따로 하는 것도 아닌데..... 결국 이것은 운동부족이다. 불과 3개월 전만 하더라도 가이드나 포터를 고용하지 않고도 히말라야 트래킹을 즐기던 나님인데 과거는 과거고 현재는 현재인가 보다. 포기하지 않고 꾸준하게 현재를 살아간다면 과거의 건강을 회복할 수 있을까. 미래의 건강을 약속할 수 있을까. 참고 힘내서 노력해야 하나. 가뿐 숨은 몰아쉬며 뛰었다.



빈 병 / 질소, 산소, 아르곤, 이산화탄소, 탄산가스, 네온, 헬륨, 메탄, 크리프톤, 수소 ..... 그 외의 많은 것들이 들어 있는 빈 병 / 빈 병이란 없어 빈 맘처럼



  세 바퀴. 그리고 네 바퀴. 4분가량의 한 곡이 이렇게 길게 느껴지다니 놀라운 일이다. 너무도 가까이 들리는 내쉬의 ‘i hate u, i love u’는 운동부족으로 아픈 가슴에 더한 통증으로 덧칠했다. '네가 싫은데 널 사랑해 / 너를 사랑하는 내가 싫어 / 그럴 마음도 없지만 다른 누구로도 널 지울 수가 없어'. 나 참, 이미 지난 일들인데, 욕 한 번하고 끝내면 될 일인데 여러가지로 쉽지 않다. 서양 사람이나 동양 사람이나 어떤 문화권에 있는 사람이든지 관계에 대해 공유하는 감정은 같구나하며 얼렁뚱땅 정리하고 눈을 지그시 감았다.


  다섯 바퀴. 하체에 얼마 없는 근육이 두근거린다. 이제 집에 갈 시간이 다 되었다 보다. 오늘은 아버지와 단둘이 지낼 예정이다. 어머니는 친정에 갔다. 하루 종일 일하고 친정에 가서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는 어머니를 돌보는 일까지 하다니 정말 대단한 분이다. 어머니를 가슴 아프게 하는 것은 잊어버려야 할 슬픈 기억들을 끝까지 기억하는 어머니의 가슴에 있었다. 즐겁고 기뻤던 기억들은 어디로 갔는지 다 사라지고 인생이란 풀기 어려운 공식이 당장 그녀의 눈앞도 펼쳐진 것이다. 아 어렵디 어려운 아픈 가슴을 쓸고 마지막 바퀴를 돌았다.


  집으로 향한 발걸음은 가볍지만 가볍지만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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