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의 회상
여드레, 그날의 회상을 심는다.
이직은 온전히 '풀'의 선택이었다. 지금 직장에서 받는 급여로는 저축이 있는 결혼 생활을 꿈꾸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미래가 있는 회사였지만, 그곳에서 '풀'은 당장 필요한 인재였지만, 운영진이 그리는 밝은 미래에 '풀'의 얼굴이 그려져 있을지는 불확실했다. 그래서 '풀'은 이직을 선택했다.
'별'과의 만남은,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을 1도 하지 않던 '풀'의 계획을 수정하게 했다. '풀'은, 본업이 아니었지만 어깨너머로 배워온 영상 촬영과 사진 촬영 분야의 일을 시작하려 했다. 기술과 경력을 쌓아 '별'이 있는 곳이 어느 지역이든지 그곳에서 창업을 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고자 했던 것이었다.
'풀'은 지역을 이동했고 일상의 공간을 옮겼다. 회사마다 이력서를 넣었다. 막내로 일을 시작하기에 적지 않은 나이지만 빠른 적응력과 일에 대한 욕심으로 탁월하게 하겠다고 말했다. 사람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았던 포트폴리오를 첨부했고 면접 담당자에게 문의의 문의를 하며 취업의 문을 두드렸지만 쉽지 않았다. 나중에 필드에서 활동하고 있는 지인을 통해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이쪽 업계에서는, 누구도 서른을 넘긴 사람을 막내로 뽑지 않는다고 했다.
확실히 새로운 일의 시작한다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풀'은 열심이란 두 글자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별'이라는 버팀목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미 안전한 곳에 자리를 잡고 있는 '별'과, 마음을 다 잡고 새롭게 시작하려는 '풀'의 이야기는 일삭을 넘기지 못했다.
'풀'과 '별'은 통화를 했다. '풀'은, 즐겁게 웃고 대화하다가도 불현듯 스치는 생각에 침묵하는 '별'을 보며 불안한 마음을 읽었다. '풀'은 그때마다 화제를 돌리며, 이 사람 정말 놓치고 싶지 않다는 생각으로 욕심을 부렸다. 그 욕심이, 여러 상황에 맞물려 이리저리 썩어가고 있는 '풀'의 심장을 후벼 판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말이다.
어느 날, 긴 침묵의 시간이 왔다. 톡을 보내고 전화를 해도 답이 없는 시간. 반가운 얼굴과 위로를 찾고자 친구의 집에 갔다. 가는 길 내내 '별'에게 톡을 보내고 싶었지만 보내지 않았다. '별'을 배려한다는 기다림이었다.
친구의 집에서 잤다. 몇 번이나 핸드폰을 들었다가 놓았는지 모르겠다. 밤잠을 설쳤다. 이별을 이미 느끼고 있었지만, 마지막의 마지막이더라도 '별'의 목소리를 듣고 싶었다. 해결할 수 있는 부분이라면 대화를 통해서 해결점을 찍고 싶었다.
다행히 다음날 아침에 연락이 닿았다. 본제는 넘기고 아무렇지 않은 듯 간단한 아침인사를 나눴다. 그냥 조금 더 관계의 끈을 놓고 싶지 않았다. '별'의 목소리를 듣고 기분이 좋아진 '풀'은 친구의 집을 나섰다. 전철을 탔다. 그리고 톡을 받았다.
'풀'은 충무로역. 갈아타야 하는 곳을 지나지 못했다. 한쪽 벽에 기대어 통화를 했다. 이제 받아들이리라 이제는 받아들이리라 더 이상 잡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질척거리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별'과 '풀'의 먼 거리 사이로, 이해할 수 없는 의미의 덕담과 안쓰러운 침묵이 오고 갔다.
"별님, 하나 둘 셋 하면 전화를 끊을게요"
"이게 우리 인생의 마지막 대화예요. 더 할 말 없는 거죠?"
"......"
"그럼 끊습니다. 하나 둘 셋"
'풀'은 전화를 끊었다.
여드레, 그날의 회상을 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