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닥까지 비추는 빛

체코_체스키크룸로프

by 인디

체코의 로켓이라는 작은 마을에 불시착했다가 겨우 빠져나온 참이었어. 분명 여름에 갔다면 강으로 산으로 돌아다니며 자연을 담뿍 느끼고 왔을 곳이겠지만, 한겨울의 로켓은 어딘가 음침하고 한산했어. 마을에 하나밖에 없던 여행자 숙소의 손님은 나 혼자였고 온 동네에 외국인이라고는 혼자인 것 같았어. 어딜 가나 시선이 따라다녔지. 그러다 말도 통하지 않는 어린 소녀에게 인종차별을 당하고 나니 마음이 가라앉았어. 숙소에 웅크리고 있던 나의 유일한 낙은 숙소 선반에 꽂혀있던 [해리포터]였어. 이미 다 읽은 이야기지만 처음 만난 친구처럼 3일 밤낮을 해리와 놀았지. 그리고 그 마을을 떠났어.


체스키크룸로프는 로켓보다는 큰 도시였고 여행자도 좀 있어서 나도 그들 사이에 섞일 수 있었어. 다른 외국인들 사이에서 내 존재감이 희미해지자 비로소 숨통이 좀 트이는 기분이었지. 하지만 한겨울의 체코는 여전히 사람이 많지 않았어. 숙소에서는 큰 도미토리룸을 채울 만큼 사람이 없다며 도미토리 가격에 개인실로 업그레이드(?)를 해주었지. 다른 여행자들이 그립던 나에게는 벌과 같은 행운이었어.


다음 날, 어느 비탈진 성벽에서 한 일본인 여행자가 그림을 그리고 있었어. 연필로 그리는 마을의 전경이 멋져서 우물쭈물 망설이다가 구경해도 되냐고 물었어. 흔쾌히 허락하더라고. 건축을 공부하는 학생이라고 했어. 장갑 낀 손을 주머니에서 빼고 싶지도 않은 차가운 날씨였는데 그녀는 계속 그림을 그리고 나는 옆에 앉아 구경했지.


여행은 항상 현재진행형이고 여행자들은 현재를 사는 사람들이어서 만나면 주로 여행 이야기를 해. 어디에서 왔는지 어디로 갈지가 서로의 최대 관심사지. 각자의 나라에 놓고 온 일상이나 미래의 고민에 대해서 이야기하기엔 인연이 길지 않으니까. 체코를 지나 이제 폴란드로 갈 거라던 그녀는 미안하다며 말문을 열었어. 그녀는 아우슈비츠를 보러 왔다고 했어. 일본이 한국에 저질렀던 역사가 독일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며 꼭 봐야 할 것 같다고 했지. 그녀의 담담한 말에 나는 고개만 끄덕였어. 그 말을 들으니 나도 묻고 싶은 게 많았지만 대부분 입에 담지는 못했어. 나보다 그녀가 몇만 배는 더 용감한 사람이었거든. 그녀는 나에게 그림을 선물로 주었어. 지금까지의 내 여행 중 통틀어 가장 소중한 기념품이 되었지.


인간에 대한 기대를 내려놓은 것 같은 길 위에서 인간 덕에 희망을 보는 것 같았어. 어쩌면 그녀가 사과할 이유도 내가 사과받을 명분도 없는데, 처참한 역사 너머의 우리가 나눈 대화는 내 마음속 깊이 어두운 곳까지 빛을 비춰주었어. 때론 너희도 사람 때문에 힘든 날이 있을 거야, 정정할게, 매우 많을 거야. 근데 돌이켜보면 결국 위로받는 것도 사람이더라고. 엄마 뱃속부터 공존을 시작한 너희에게는 고통이면서도 희열인, 굴레이면서 축복인 ‘함께’라는 게 조금 더 쉬웠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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