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의 습도

by 인디

오래전 뉴욕행 비행기에서 한 할아버지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큰 키의 미국인 할아버지는 옆자리에 배정된 작은 저를 보자 크게 안도하는 듯했습니다. 짧은 인사 후 그는 옆자리의 저를 보고 기뻤다는 말과 함께 작은 씨앗에서 위대한 것들이 나온다는 격언까지 읊어주셨습니다. 아시아 여성 평균인 (아닐 겁니다) 저를 씨앗에 비유하는 것은 좀 억울했지만 기쁨에 찬 노신사의 눈에는 그랬을 수 있죠. 그 이후로 비행은 저에게 그저 이코노미 좌석에 걸맞은 나의 경제적인 몸에 감사하는 시간이었습니다.


건조한 저와는 달리 엄마의 비행은 여전히 경이로움이 가득했습니다. 어린아이처럼 엄마는 잡힐 듯 가까이 보이는 구름이 내내 신기했고 지금 어디쯤 가고 있는지 계속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엄마의 작은 화면에는 영화 대신 비행기 이동 경로가 오래도록 켜져 있습니다.


- 지금 중국을 지나고 있어.

- 응, 그렇네.

- 와, 이제 러시아를 횡단하고 있어.

- 어, 러시아네.

- 여기 봐, 아직도 러시아야.

- 그러게.


몇 시간 째 러시아 대륙 위를 날고 있는데도 지치지 않는 엄마에게 성의 없이 대답하는 동안 비행기는 부지런히 엄마의 안전지대(comfort zone)를 벗어나고 있었습니다. 그곳에는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예측할 수 없지만 익숙한 만큼 안정된 그동안의 매일과는 다른 생경한 날들을 맞이할 겁니다. 낯선 것들은 주로 두렵고 불편하기도 하겠지만 처음 느끼는 자극과 환희를 주겠지요. 이만큼 살아도 여전히 새로운 것이 있다는 것은 기쁜 일입니다. 작거나 큰 ‘첫’ 경험들이 한 번 살아볼 만하게 만들어 주는 게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엄마와 긴 여행을 위해 이렇게 긴 비행을 하고 있다니, 정말 오래 살고 볼 일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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