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률 산문집 [끌림] 외

나 홀로 독서 챌린지(feat. 방구석) NO. 3

by IndigoB

지난해 12월, 도서관에서 주최한 [2025 행복 시 콘서트]에 다녀왔다.

이번 특강의 주인공은 섬세한 언어로 마음을 건드리는 이병률 시인이었다.


이곳은 <연탄 한 장>, <너에게 묻는다>로 잘 알려진 안도현 시인의 고향이기도 하다. 그래서일까, 지역 전체에 흐르는 시에 대한 애정이 유독 남다르다. 프로그램을 기획한 사서 선생님의 시 사랑 또한 그에 못지않게 극진하다. 덕분에 평소 흠모하던 시인들을 직접 마주하며 마음을 채우는 귀한 시간을 누리고 있다. 내가 도서관에서 문학 관련 특강이 열리면 열 일을 제쳐두고 달려가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지난여름, 어느 카페에서 소수정예로 만났던 '시인계의 아이돌' 박준 시인의 이야기도 참 좋았는데, 그날의 기억은 조만간 브런치를 통해 따로 기록해 보려 한다.



이병률 시인은 2005년 출간된 여행 산문집 《끌림》으로 대중에게 이름을 깊이 각인시켰다. 특히 첫 챕터인 '열정이라는 말'은 서정적이고 낭만적인 문체로 당시 엄청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지금까지도 꾸준히 사랑받는 이 스테디셀러는, 많은 이들이 '열정이라는 말'의 열두 줄 문장 전체를 직접 필사하며 그 여운을 간직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열정이라는 말에는 한 철 태양이 머물다 지나간 들판의 냄새가 있고, 이른 새벽 푸석푸석한 이마를 쓸어 올리며 무언가를 끼적이는 청년의 눈빛이 스며 있고, 언제인지 모르지만 언젠가는 타고 떠날 수 있는 보너스 항공권 한 장에 들어 있는 울렁거림이 있다. 열정은 그런 것이다. 그걸 모르면 숨이 막힐 것 같은 어둠에 놓여 있는 상태가 되고, 그걸 갖지 아니하면 신발을 신지 않은 채 낯선 도시에 떨어진 그 암담함과 다르지 않다.


사랑의 열정이 그러했고 청춘의 열정이 그러했고 먼 곳을 향한 열정이 그러했듯 가지고 있는 자와 가지고 있지 않은 자가 확연히 구분되는 그런 것. 이를테면 열정은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건넌 자와 건너지 않은 자로 비유되고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강물에 몸을 던져 물살을 타고 먼 길을 떠난 자와 아직 채 강물에 발을 담그지 않은 자, 그 둘로 비유된다.


열정은 건너는 것이 아니라, 몸을 맡겨 흐르는 것이다.






2022년 발간한 산문집《그리고 행복하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에서 시인은 사랑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꼬집는다. 각자가 지닌 고정관념과 편견이라는 닫힌 세계 안에서, 자신이 얻은 얄팍한 지식과 경험만으로 사랑을 서둘러 이해하고 결론지으려는 그 '조급한 폐쇄성'에 대하여 말이다.


세상은 냉동칸에 들어 있는 열 칸짜리 얼음틀. 냉엄하면서도 지긋지긋한 기준들은 신호등 앞에 서 있는 사람에게 아주 길고 긴 빨간불을 켜준다. 세상은 빨간불로 가득 차 있어 기차는 출발할 줄 모르고 우리들은 머뭇거리며 추워한다. 자신이 본 것과 경험한 것이 아니면 모두 사실이 아닌 것이 된다. 자기가 이제껏 맡아보지 않은 향기 앞에서 말이 안 된다며 고개를 젓기도 하며, 자신과 그것이 영원히 어울릴 수 없다는데 무슨 소리냐며 부정한다. 보통의, 평균의 삶을 사는 게 누구나 원하는 일이라면, 그 또한 도달하기 쉽지 않은 기준이겠지만 정말로 인류 모두가 그 기준을 붙들고 산다면...... 우리는 그렇고 그런 사람이 되어 세상에 녹고 만다.

- p.110


가질 수 없는 것 앞에서 우리는 손목의 힘이나 빼고 살 수는 없다. 그러니까 말이다. 사랑으로 인생을 뒤집을 수 있다는 카드를 알고 있다면 그 카드를 쥐고 사랑에 확률을 걸자. 사랑이라는 유리조각을 기꺼이 밟자. 사랑만이 우리를 살아 있게 하고, 사랑만이 우리를 더 나은 쪽으로 견인한다.

- 중략 -

신은 우리에게 가끔 한 장의 카드를 보내준다. 카드에는 단 몇 초. 그 몇 초를 잘 쓰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우리에게 찾아온 그 몇 초동안, 우리가 얼마나 충실할 수 있느냐가 사랑을 하게 되느냐, 사랑을 놓치게 되느냐의 문제.

많이 외로운 것도, 많이 힘든 것도, 나의 기분이 찬물처럼 하루 종일 차가운 것도...... 우리가 사랑을 하고 있느냐, 사랑을 안 하고 있느냐의 문제.

- p.110~1






그리고, 2024년 새 시집 《누군가를 이토록 사랑한 적》이 세상에 나왔다.


누군가를 이토록 사랑한 적


누군가를 이토록 사랑한 적

시들어 죽어가는 식물 앞에서 주책맞게도 배고파한 적

기차역에서 울어본 적

이 감정은 병이어서 조롱받는다 하더라도

그게 무슨 대수인가 싶었던 적

매일매일 햇살이 짧고 당신이 부족했던 적

이렇게 어디까지 좋아도 될까 싶어 자격을 떠올렸던 적

한 사람을 모방하고 열렬히 동의했던 적

나를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게 만들고

내가 달라질 수 있다는 믿음조차 상실한 적

마침내 당신과 떠나간 그곳에 먼저 도착해 있을

영원을 붙잡았던 적


나도 생애 한 시기, 한 지점에서 누군가를 사랑한 적이 있었다. 이제는 희미해진 기억의 뒤편을 더듬어 ‘그랬던 적’를 건져 올리면, 결국 그 시절 내 모습이 한 장의 사진처럼 선명하게 떠오른다. 동시에 잊고 지냈던 그때의 공기가 되살아나, 마음은 몽글몽글 피어오르다 이내 뭉클함으로 차오른다. 내게 최선이 무엇이었을까 되뇌며, 아쉽고 서운한 마음 한구석이 찌릿해진다.






이병률 시인은 사랑으로 충만한 시인인 것 같다. 프랑스 파리에서 체류하는 동안 행복했던 기억을 더듬는 그의 눈길이 잠시 아련해진다. 그 순간 나는 상상했다. 파리의 작은 골목 카페에서 커피 향과 함께 책을 읽다, 우연히 곁을 스치며 시선이 닿은 파리지앵에게 화답하듯 산뜻한 미소를 지어 보였을 시인의 다정한 얼굴을.


"파리가 왜 예술가의 도시일까요. 파리 사람들은 예술가를 정말 존중하고 사랑합니다. 카페나 음식점 사장님들이 주머니가 가벼운 예술가에게 선뜻 음식과 커피, 차를 내어주죠. 설사 그가 하루 종일 테이블에 앉아서 무언갈 끄적이거나 하릴없이 빈둥댄다고 해도 결코 쫓아내는 법이 없어요."


"파리엔 자치구로 20구가 있는데요. 각 구에는 지역 문화를 잇는 예술가들이 상주하는 동네가 있어요. 지역민들이 암묵적으로 이 예술가들을 챙기고 함께 돕는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조성되어 있어요. 당장 잠자리가 필요하면 선뜻 빈방을 내어주고, 먹을 게 필요하면 각자 가정에서 소박한 음식을 제공하죠. 이 불문율 같은 합의가, 파리를 예술가들이 행복한 도시로 만든 원동력인 것 같아요."


그는 자신의 시에 대해 잠시 운을 뗐다. 대중의 큰 사랑을 받는 나태주 시인의 시에 비해, 본인의 시는 훨씬 어렵고 모호해서 이해하기 힘들다는 사실을 스스로도 잘 안다고 했다. 그 담담한 어조가 내게는 시인의 내밀한 고백처럼 다가왔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원래 시라는 게 조금은 어려운 법 아닌가?’ 하는 생각에 고개를 갸웃했다. 가독성이 좋아 직관적으로 읽히는 시는 다정해서 좋고, 한참 곱씹어야 하는 시는 관념의 강을 천천히 노 저어 가듯 음미하면 될 일인데 말이다.


시(詩)는
답을 가르쳐주질 않은 채
배배 꼬고, 휘 에둘러 감정을 표현하는
수수께끼 같은 무엇.


내 솔직한 생각은 이렇다. 이병률 시인은 시보다 산문으로 대중의 더 큰 사랑을 받는 듯하다고. 산문을 시처럼 감각적으로 써 내려가는 그의 기질은 시인에게 축복이자, 때로는 넘어야 할 그림자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든다. 시인은 최근 소설이라는 새로운 세계에 도전 중이라는 근황을 전했다. 소장하던 《끌림》과 선물 받은 《그리고 행복하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에 사인을 받으며, 소설집이 나오면 꼭 찾아 읽겠노라고 진심 어린 응원을 건넸다.


그의 산문도 좋지만, 지금은 시집을 다시 펼쳐 천천히 읽어보고 싶다. 나에게 시는 여전히 미지의 영역이다. 그동안 몇 편의 시를 끄적여보기도 했지만, 돌아서면 부끄러움이 앞섰다. 논리와 합리에 길들여진 나의 좌뇌는 자꾸만 기승전결의 구조에 갇혀 기어코 소설 같은 문장을 뱉어내곤 한다. 조만간 이 이성적인 스위치를 잠시 꺼두고, 시 하나를 멍하니 붙잡고 앉아 내 안에 잠든 우뇌를 실컷 깨워볼 심산이다. 언젠가 나도 감각적이고 서정적인 시 한 편을 지어 올릴 날을 꿈꾸며, 마음속에 작은 소망 하나를 품어본다.


글을 마무리하며 독자와 함께 듣고 싶은 노래는 2곡이다.


La Vie En Rose - Daniela Andrade


스텔라장 L’amour, les baguettes, Paris






목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