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환상, 꿈

by IndigoB

정신을 잃은 그 순간만이 파편처럼 어렴풋이 떠오른다. 앞서가던 그를 망설임 없이 따라가던 중이었다. 그런데 어찌 된 영문인지 주변이 갑자기 어두워졌다. 맑던 하늘에 먹구름이 몰려오더니 억수 같은 장대비가 쏟아졌다. 저 멀리 구름 사이로 번개가 섬광처럼 번쩍 거렸고, 곧이어 고막을 찢는 듯한 굉음이 울렸다. 나는 그 소리에 심장이 멎는 듯한 충격을 받으며 의식을 잃었다.


이미지 출처 - Pixabay.com


다시 눈을 떴을 때 주변은 어두컴컴했다. 풀벌레 소리만 들리는 고요한 밤이었다. 허공에 손을 뻗어 휘둘러보았지만 아무것도 만져지지 않았다. 코끝에 흙 내음 섞인 물 비린내가 머물렀다. 스멀스멀 피어오른 밤안개가 하천 위에 뒤덮일 때마다 풍기던 냄새였다. 등허리로는 습기를 머금은 풀의 축축한 촉감이 전해졌다. 나는 하늘을 보고 누운 채로 이 낯선 공간에 불시착해 있었다. 황망한 마음이 들어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목이 말랐다. 무거운 몸을 일으켜 세우자 땅바닥이 아래로 잡아당기는 듯한 무게감이 느껴졌다. 멀리서 물 흐르는 소리가 어슴프레 들렸다. 그 소리를 따라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앞으로 나아갈수록 소리는 점점 뚜렷해졌다. 근처에 다다르자 어두웠던 시야가 환해졌다. 밤안개가 깔린 수면 위로 잔물결이 반짝이고 있었다. 어디선가 흥얼, 흥얼하는 콧노래가 들려왔다.


AI 생성 이미지 - Google_Nano Banana


한 여인이 물속에서 바지런이 몸을 씻고 있었다. 기분 좋은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며 목덜미와 팔에 물을 끼얹었다. 그녀를 본 순간, 내게 참기 힘든 갈증이 갑자기 몰려왔다. 나는 곧장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차가운 물이 입, 코, 귓구멍 속으로 밀려 들어오고, 머리끝까지 물이 차올랐다. 물을 마신다기보다 내 몸이 물 자체가 되는 기분이었다. 전혀 숨이 차지 않았고, 오히려 공기처럼 가벼워졌다. 나는 흐름에 몸을 맡기고 유유히 물속을 떠돌았다. 이내 알 수 없이 환하고 하얀빛이 나타나 내 주변을 에워 감쌌다. 그 빛에 눈이 부셔 눈살을 찌푸렸다.


물아래로 여인의 풍만한 젖가슴과 잘록한 허리, 도톰하게 살이 오른 엉덩이가 보였다. 그녀의 매끄러운 곡선과 풍만한 실루엣이 선명했지만, 얼굴만은 보이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 느꼈던 갈증은 이미 사라지고 묘한 기쁨과 설렘이 차올랐다. 그때 어떤 신비한 힘이 내 안으로 흡수되어 들어오는 낯선 느낌을 받았다. 그 힘은 내 몸을 한데 응축시켰다. 아주 작게 변한 나는 여인의 가장 깊고 내밀한 몸속으로 순식간에 빨려 들어갔다.


그 일은 정체 모를 강력한 힘에 사로잡혀 눈 깜빡할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소설 #동양판타지 #재해석 #전래동화 #창작소설

이전 03화03. 객식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