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 아버지의 출타

by IndigoB

유난히도 춥고 지독했던 겨울이 드디어 짐을 쌌나 보다. 한 해가 지나고 다시 봄이 왔다. 엊그제까지만 해도 꽃샘추위 때문에 개울물이 얼었다 녹았다 하더니, 오늘은 제법 쫄쫄쫄 소리를 내며 흐른다. 하늘은 속이 다 보일 만큼 파랗고, 공기는 새색시 치맛자락처럼 보들하게 산골 마을을 휘감았다. 어디선가 쿰쿰하고 구수한 된장 냄새가 코끝을 간질였다. 괜히 가슴이 두근거리고 명치 아래가 간지러운 게, 정말 봄이 오긴 왔나 싶었다.


나는 마당 커다란 감나무 앞 바위에 올라가 까치발을 들고 서서 나뭇가지를 올려다보았다. '혹시 새순이 돋았을까?' 손을 쭉 뻗어 푸르스름한 기운이 도는 마디 끝을 만져봤지만, 아직은 매끈하고 밋밋했다. 에이, 하고 실망해서 뒤를 돌아보니 어머니가 부엌 부뚜막에서 서성이고 계셨다. 가마솥뚜껑을 열어 안을 슬쩍 보시더니,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신다. 안 봐도 뻔했다. 당장 오늘 아침에 먹을 끼닛거리가 없는 거다. 올해도 보릿고개라는 놈은 어김없이 우리 집 문턱을 넘었다.


밖은 이렇게 따뜻한데 우리 집엔 아직도 시린 겨울바람이 휭 부는 것 같다. 이웃 사람들한테 이미 빌릴 만큼 빌려서, 이젠 정말 손 벌릴 곳도 없다. 아침 일찍 큰언니랑 둘째 오빠가 일감을 찾으러 집을 나섰지만, 사실 큰 기대는 안 한다. 어머니 한숨 소리에 마음이 안 좋았는지, 작은언니가 마루에 앉아 바느질감을 집어 들었다. 나도 얼른 언니 옆에 찰싹 붙어 앉았다. 딴생각 안 하고 손을 바삐 움직이다 보면 배고픈 것도 잠깐 잊히고 마음도 차분해졌다. 한 살 더 나이가 드니 실력이 늘어 이젠 제법 바느질이 꼼꼼하고 날랬다. 빨리 끝내고 나물이라도 뜯으러 가야겠다 생각하던 그때, 아버지가 헛기침을 하며 안방에서 나오셨다.


어라? 아버지 차림새가 예사롭지 않았다. 누렇게 빛바랜 낡은 도포를 챙겨 입으시고는, 한쪽이 찌그러진 갓을 손으로 슥슥 펴서 정성껏 머리에 쓰시는 게 아닌가. 뭔가 엄청난 결심을 하신 것 같은 비장한 기운이 느껴졌달까, 아무튼 평소랑은 딴판인 아버지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긴장이 됐다.


(이 아침에 아부지가 웬일로 저리 차려입으셨대? 댓바람부터 어델 가시려구?)


궁금한 건 못 참는 내가 재빨리 아버지의 낡은 가죽신을 챙겨 왔다. 먼지를 입으로 후후 불어 털어내고 발치에 가지런히 놓아 드렸다. 아버지가 그런 나를 물끄러미 보시더니 또 한 번 헛기침을 하고 신을 신으셨다. 그리고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황급히 달려 나온 어머니에게 말씀하셨다.


- 여보, 나 형님 댁에 잠시 다녀오겠소.


- 아니, 그 댁에 가본들 무슨 뾰족한 수가 있다구 그러시우! 형님이란 분은 남보다 못한 사람인디!


- 오늘이 형님 생신날이잖여. 가서 축하도 드리고 음식도 좀 얻어올랑게.


- 그 형님 내외가 어지간히 잘도 반겨주겄소! 몰매나 안 맞으믄 다행이지, 우찌 거길 가신대요!


어머니랑 작은언니가 길을 막아섰고, 동생들도 무슨 일인가 싶어 우르르 몰려나왔다. 놀부 큰아버지는 지난 설에도 우리 식구를 아주 매몰차게 쫓아냈던 사람이다. 거지 대접도 그렇게는 안 할 거다. 맛있는 제사 음식을 쌓아두고도 물 한 대접도 안 주더니, 오히려 양동이에 든 물을 우리한테 확 끼얹었었다. 아, 생각해 보니 물벼락도 물을 주긴 줬네. 아주 시원하게! 덕분에 우리 식구는 정초부터 비 맞은 생쥐 꼴로 덜덜 떨며 돌아와야 했다. 어머니가 저렇게 펄쩍 뛰며 말리는 것도 다 이유가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단단히 마음을 먹으신 듯, 어머니의 손을 덥석 잡으셨다.


- 이참에 돌아가신 부친이 내게 남기신 땅, 형님과 담판을 지어올 터잉께, 임자는 걱정 말고 기다리소잉.


그때 갑자기 내가 끼어들어 냅다 소리를 질렀다.


- 저! 저도 아부지 따라갈라요! 큰아부지 성격이 보통 아닌디, 아부지께서 일이라도 당하믄 어쩐대여!


- 이잉? 용순이 니가?


- 혹시 아부지헌티 뭔 일 있으믄 제가 쫓아와야잖어여! 이래 봬도 저 뜀박질 하난 기똥차게 날아다녀여!


내가 덜컥 따라가겠다고 나서니 아버지와 어머니, 작은언니 모두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날 쳐다봤다.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방으로 들어가 옷을 주섬주섬 챙겨 입고 서둘러 봇짐을 꾸렸다. 봇짐에 여러 군데 꿰맨 버선 서 너 켤레랑 충분한 여벌 옷도 야무지게 챙겼다. 혹시라도 지난번처럼 물세례를 맞으면 얼른 갈아입을 생각이었다. 어머니가 우리가 사립문을 나설 때까지 시름이 가득한 얼굴로 겨우 따라와 배웅했다. 아버지는 뒤돌아보지 않은 채 애꿎은 갓끈만 단단히 조여 매며 앞장서 걸으셨다. 나도 어머니와 동생들을 향해 '금방 다녀올게요!' 하고 씩씩하게 손을 흔들었지만, 어깨에 멘 봇짐이 오늘따라 유난히 묵직하게 느껴졌다.


마을 어귀를 벗어나자 길가에는 이름 모를 들꽃들이 노랗고 하얗게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배에서는 눈치도 없이 꼬르륵 소리가 났지만, 나는 일부러 허리를 꼿꼿이 펴고 아버지의 뒤를 바짝 쫓았다. 아버지는 평소보다 보폭을 크게 하며 뚜벅뚜벅 걸으셨다. 낡아서 다 해진 가죽신이 자갈길에 닿을 때마다 슥슥 소리를 냈다. 그에 반해 아버지의 등판은 여느 때보다 넓고 든든해 보였다. 한참을 걷다 보니 저 멀리 고갯마루가 보였다. 아버지가 잠시 멈춰 서서 땀을 닦으시더니 나를 돌아보며 말씀하셨다.


이미지 생성 - Microsoft_Copilot


- 용순아, 다리 안 아프냐? 시방이라도 힘들믄 돌아가도 돼야.


- 아이고 아부지, 제 걱정은 마시랑게요! 저 아까 말했잖여요, 저 우리 동네서 축지법 쓰는 용순이지라.


나는 일부러 다리에 힘을 꽉 주고 깡충 뛰어 보였다. 아버지는 그제야 엷은 미소를 지으시며 내 머리를 툭툭 쓰다듬으셨다.


- 오냐, 우리 딸내미가 아부지보다 낫구먼. 근디 용순아, 혹시라도 큰아부지가 무섭게 나오믄 넌 무조건 내 뒤에 숨어야 한다, 알겄냐?


- 아부지, 걱정 마셔여. 요번엔 지가 아부지 딱 지켜드릴 거니께, 참말로 끄떡없당게요!


내 당찬 대답에 아버지는 허허, 하고 기분 좋은 웃음을 터뜨리셨다. 하지만 고개를 넘어갈수록 아버지의 표정은 다시금 굳어졌다. 저 언덕 너머, 기와지붕이 으리으리하게 솟아 있는 큰댁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나는 어깨에 멘 봇짐 끈을 다시 한번 바짝 잡아당겼다. 봄바람은 따스하게 뺨을 스쳤지만, 내 마음속엔 커다란 폭풍우가 몰아치기 시작했다.


(얼굴에 심술보가 덕지덕지 붙은 못된 영감탱구, 이번엔 그냥 당하고만 있지 않을 것이구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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