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등점에 도달하기 직전까지 플라스크 안의 물은 평상심을 잃지 않는다. 그러다가 놀란 듯 끓어오른 물이 깔때기를 거슬러 올라 커피 분말을 요동치게 만든 뒤에도 플라스크 안에 남은 약간의 물은 강물을 역류하는 연어처럼 그르렁대며 플라스크 밖으로 깔때기를 타고 차오르려 한다. 일 분 남짓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이윽고 알코올램프를 끈다. 순간 플라스크 속에서는 우주가 멈춘 듯 고요한 진공상태가 되었는가 싶다가 무서운 기세로 깔때기 위에서 혼합되어 추출된 커피를 블랙홀처럼 빨아들인다. 순식간이다. 커피가 빨려 내려간 뒤 깔때기 위에 남은, 모래알처럼 고운 커피 찌꺼기는 계란쿠키 모양으로 앙증맞게 남는다.
1984년 어느 가을날 늘 그렇듯 클래식 음악이 배경으로 깔린 커피숍 세모시의 구석 자리에 앉아 사이폰 커피가 추출되는 모양을 나는 그렇게 지켜보고 있었다.
오늘 아침 에스프레소 기계에서 커피가 추출되어 나오는 장면 위로 사이폰 커피와 알코올램프 모양이 중첩되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날 어떤 곡이 배경으로 흘러나왔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저 1984년 어느 가을날일 뿐이었다.
세모시에서.
(사진 출처: https://www.flickr.com/photos/deadling/84596727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