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물지기의 따뜻한 수프
어렸을 적 우리 집 옆에는 우물이 하나 있었다. 거기에서 물을 퍼서 쓰는 사람은 많지 않았지만 나름 두레박도 있고, 도르래도 손잡이도 잘 달려있었다. 우리는 호기심에 한참을 우물 안을 들여다보았지만 누구도 그 안으로 밀거나 떨어뜨리려 하지 않았다. 모두가 그냥 들여다보고 싶은 마음을 그대로 실천에 옮겼고 아무런 두려움 없이 그저 우물 안을 들여다보았다. 우물 안은 어두우면서도 밝았다. 우물에 고개를 들이밀면 마치 빨려들 듯한 느낌에 휩싸이곤 했다. 저 아래 우물의 수면은 위에서 비친 빛에 일렁거렸다. 우물을 향해 소리치면 우물은 한 일 이초쯤 뒤에 내 말을 따라 했다. 말소리는 또렷하지는 않았다. 우물 벽은 축축했고 둥그런 돌 틈마다 퍼런 이끼들이 잔뜩 자라 있었다.
어느 날부터 우리들은 우물가에 다가서는 것을 꺼리기 시작했다. 우물가에 얼씬거리지 않게 된 것은 들리는 소문을 따라 '공포'라는 것을 학습한 뒤부터였다. 오랜 옛날 어느 처녀가 양반집 망나니 아들에게 정조를 잃은 뒤 절망하여 빠져 죽었다느니, 그 처녀를 흠모하던 더벅머리 총각이 양반집 망나니의 모가지를 낫으로 따버리고 그 뒤를 따라 빠져 죽었다느니 하는 말들이 떠돌았는데 우리는 그 말을 철석같이 믿고 어두워진 후나 혼자는 우물가에 얼씬하지 않았다.
우물을 들여다보아도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던 우리는 언젠가부터 우물가에서 친구들을 경계하기 시작했다. 누가 나를 밀어버릴 것 같은 공포는 자연스럽게 분노로 이어져 우물가 근처에서 조금만 몸을 건드리거나 손을 잡아도 화들짝 놀래며 왜 건드리냐 나를 떨어뜨리는 거냐며 화를 내었다. 이야기들이 모두 다 가짜라는 것을 안 이후는 이미 두려움을 환상으로 창조하는 능력을 모두 배우고 난 뒤였다. 어른이 되어서도 우물은 여전히 스산한 기운이 감돌게 하는 존재로 그들의 가슴에 남게되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런 소문 가운데에서 여전히 우물을 들여다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아이들이 있었다. 그들 역시 어른이 되었고, 우물을 두려워하는 이들 대신 맑은 물을 길어 올리거나 때로는 우물 안으로 들어가 깨끗한 물이 올라오게끔 청소하는 일을 도맡기 시작했다.
그리고 우리는 그들을 우물지기라 부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