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청명 이영주 Jan 02. 2019

만화책

만화마니아새댁


지금은 육십 대쯤 되었을 것 같지만 아직 풋풋한 새댁이었던 당시, 그녀 부부는 우리 집에 세 들어 두어 해를 살았다. 간혹 그들에게 놀러 가면 늘 만화책이 가득했다. 대체로 내용은 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한 뇌쇄적 여자 스파이의 활약상을 그린 것들이었다. 물론 성인 취향의 만화였으니 나 같은 국민학생에게 권할 것들은 아니었고 물론 권하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우연히 들춰보는 나를 딱히 제지하지도 않았으니 꽤나 자율적인 분위기였다고나 할까?


여전히 나름대로 또렷한 장면 중 하나는 만화의 몇 장면.


칠흑같이 어두운 밤 길을 헤드라이트를 밝힌 지프 한 대가 내달린다. 검문소에서 까만 가죽장갑의 운전자가 신분증을 내밀자 헌병은 즉시 차단기를 올린다. 장면이 바뀌어 시가를 꼬나 문 핸섬한 독일군 장교는 뭔가 작전 서류 같은 것을 유심히 보고 있다. 하얀 손이 까만 문을 노크하고, 베레모를 쓴 금발(이라고 추정되는)의 미녀가 하이힐을 문틈으로 내민다. 그리고, 이런저런 밀당이 오가더니, 미녀는 장교를 도발하고, 다음 장면은 19금으로 이어진다. 물론, 장교가 몰입한 사이 여자는 반지 뚜껑을 살짝 열고 문서를 촬영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마타하리>라든가 하는 팜므파탈 스파이 이야기를 들으면 간혹 그 만화의 장면들이 겹쳐진다. 마치 <신 시티>의 한 장면처럼. 어쩌면 그 만화책은 그녀보다는 남편 쪽의 취향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녀의 취향은 <알프스의 소녀 하이디>나 혹은 <베르사유의 장미> 스타일이었을 수도 있다.




어쨌거나 그녀는 얼마 후 배가 불렀고 또 얼마 후 집에서 아이를 출산했다. 출산하던 날 나는 사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지 못했다. 다만 그날 오후 집안을 어슬렁거리던 나는 새댁 부부의 닫힌 방문 앞에 무엇인가 핑크 빛 물체가 담긴 대야가 놓인 것을 보았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로 미뤄보아 그것은 태반이었을 것이다. 아이를 낳은 뒤 얼마나 그들이 우리 집에 더 살았는지는 떠오르지 않는다. 새댁의 얼굴도 자세한 것은 떠오르지 않는다. 다만, 파마머리에 얼굴이 다소 둥근 모양이었다는 정도의 실루엣이 전부이다. 그 기억마저 진짜인지 기억이 기억을 만든 것인지 알 수 없다. 실제로 만화 마니아 새댁의 얼굴은 눈썹도 눈도 코도 입도 없는 채로 뒤를 휙 돌아보는 요괴 만화의 한 장면 같기도 하다. (내 표정을 돌려줘~!)



(사진출처: 한국콘텐츠진흥원, 네이버블로그 Comixpark)






매거진의 이전글 스웨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