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청명 이영주 Dec 24. 2018

악보

작곡가 나운영

고등학교 한 때 작곡가가 되고 싶었다. 중학교 3학년이었을 수도 있다. 어쨌든 노천명 시인의 시 <길>에 곡을 붙여 3/4박자의 가곡을 작곡하고 반주 악보와 함께 그에게 우편으로 보냈다. 당시 그는 전남대학교 음악대학장인가 그랬는데 내가 즐겨 읽던 계간지 <레코드음악>에 칼럼을 기고 중이었다. 나는 그가 재직 중인 대학의 주소를 알아낸 뒤 당돌하게도 직접 쓴 악보를 일면식도 없던 그에게 불쑥 보낸 것이었다.


놀랍게도 며칠 뒤 답장이 왔다. 내가 그려 보낸 악보에 빨간색 볼펜으로 정갈하게 코멘트를 손글씨로 적었다. (물론 당시에는 손글씨가 예사였다.) 그가 몇 군데 화성학적인 코멘트와 함께 고쳐 그린 음표들은 분명 자를 대고 그린 듯 매우 바르게 그려져 있었다. 그가 상당히 꼼꼼한 성격임을 말해주는 듯했다. 총평은 대략 이러했다.


'어린 학생이 만든 곡을 보내주어 잘 보았다. 아직 서투르지만 통절 가곡*으로서 발전 가능성이 있다. 열심히 노력하기 바란다.' 


그 후로도 두세 번 정도 우편 지도가 이어졌던 것 같다. 직접 만나지는 못했다. 부모님의 반대로 음악이나 서예를 접어야 했고 또 본질적으로 내 끈기가 부족해서 얼마 후에 스스로 포기한 것도 이유였다.


나는 꽤 오랫동안 그가 빨간색 볼펜으로 가필한 그 악보를 버리지 못하였다. 결국 세기가 바뀐 뒤로 어디론가 사라지고 말았다. 곡은 여전히 기억하고 있다.


나 교수는 일면식도 없지만 그가 일평생 매주 한 곡 씩 종교곡을 작곡하기로 서약한 뒤 그것을 실행에 옮겼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에게 사사한 작곡가 지망생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그중 상당수는 그의 제자가 되었거나 다른 음대에 진학했을 것이다. 나처럼 스쳐간 사람은 부지기수일 것이다. 나도 그중 하나일 테지만 정성 들여 자를 대고 음표를 그려가며 코멘트를 달아서 반송해준 사람은 몇이나 될까? 어쩌면 그는 원래 그런 사람일지도 모른다. 일일이 편지에 답장을 보내주는 사람. 하지만 답장을 받는 사람에게는 특별한 기억이 되지 않을까? 지금 생각해보면 예술계로 나서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하지만 소년 시절 한 때 잠깐 꿈꾸었던 예술가의 꿈을 존중받았다는 행복한 기억을 만들어준 그에게 감사드린다.


메리 크리스마스!


*통절 가곡: 통절 가곡은 가곡에서 가사의 각 절이 각각 다른 선율로 이루어진 가곡을 말한다. 유절 가곡이 비교적 단순한 가사로 되어 있고, 가사의 각 절이 제1절의 선율을 반복하고 있는 데 반하여, 통절 가곡은 각 절마다 내용이 새롭게 전개되는 극적인 것이 많고 선율도 각각 다르다. 슈베르트의 「마왕」이 대표적인 작품이다.



슈베트르 <마왕> 자필 악보 (자료출처: 위키피디아)


매거진의 이전글 전자 음악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