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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명 이영주 Jan 12. 2019

메달

간첩

5학년 때였지 그것은. 겨울이었어. 추웠지. 가으내 원고를 외고 연습한 나는 학교 대표로 지역 동화구연대회에 나갔던 거야. 반공방첩이 주제였고 내 원고의 플롯은 빨갱이를 상징하는 게걸스런 멧돼지에 대항하는 약한 산짐승들의 용기와 지혜에 관한 것이었어 아마도. 지금 생각하면 헛웃음이 나올 얘기지만 그때는 일 년에도 두어 번씩 불온삐라를 신고하는 방공방첩 훈련이 있던 시절이었으니까. 


그때 받은 동메달은 지금도 갖고 있는데 줄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메달만 남았지. 그 메달을 볼 때면 동화구연대회가 열렸던 국민학교의 흙먼지 날리던 교정이 떠올라.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말이야. 그런데 같이 참가했을 적지 않은 수의 여러 다른 학교 아이들은 전혀 기억이 나질 않아. 이상하게도. 내가 왜 그 대회엘 나가게 되었는지도 기억나질 않아. 

얼마 뒤 월례조회에서 상장 수여식이 열렸고 나는 목에 예의 그 메달을 건 채 다시 한번 같은 원고로 동화 구연을 했어. 박수를 받았는지 그건 기억이 나질 않아. 그런데 말이지 그때도 난 그 메달을 받은 게 그리 기뻤던 것 같진 않아. 김일성을 상징하는 긴 송곳니의 포악하고 탐욕스러운 멧돼지 이야기가 별로 재미없었을까? 
 


반짝이던 메달은 지금은 오래된 동전처럼 색이 바랬는데 메달 뒷면엔 1975년 11월이란 숫자가 내게 뭔가 말을 건네는 듯한 모양으로 새겨져 있어. 이사를 여러 번 다녔는데도 나는 그 메달을 버리지 못했지. 왜 그랬는지 딱히 이유를 대긴 쉽지 않아. 몇 번이고 난 그것을 만지작 거리다가 다시 상자에 집어넣어 이삿짐 목록에 포함시키곤 했지.


나를 대회장까지 인솔했던 선생님이 누구였는지 얼굴이 생각나질 않아. 밝은 빛을 등지고 선 듯 얼굴은 그늘져서 제대로 보이질 않았고, 부연 햇살 때문에 윤곽이 또렷하지 않았지. 흙먼지 때문이었을까. 나는 눈을 제대로 뜰 수 없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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