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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명 이영주 Jan 11. 2019

애저

겨울 한 밤의 인부들

아버지가 재직하시던 대학 부속 동물 농장에 간혹 놀러 갔다. 어느 저녁엔가 아버지가 연락을 받고 급히 농장으로 향했다. 겨울이었다. 추웠다. 눈발이 약간 흩날렸던 것 같다. 급한 일은 돼지의 출산이었다. 돼지우리(豚舍)에 가보니 커다란 검정 암퇘지(雌豚)가 산통을 겪고 있었다. 인부들은 마른 짚을 깔아주고 난로를 들여놓는 등 분주했다. 나는 어려서 딱히 할 일도 없이 축축한 돼지우리 한 켠에서 가만히 서있는 게 할 수 있는 모든 것이었다.

얼마쯤 시간이 흘렀을까? 암퇘지가 드디어 분만을 시작했다. 돼지의 분만은 어쩌면 꽤나 싱겁기조차 하다. 모로 누운 어미 돼지가 새끼 돼지 한 마리를 밀어내듯 분만하면 출산을 돕는 인부들이 새끼 돼지의 탯줄을 정리하고 분비물을 닦은 후 어미 젖무덤 가까이에 옮겨둔다. 아직 눈을 뜨지 못한 어린것이 바지런히 꿈틀거리며 어미 젖을 찾는다. 그러는 사이 다른 새끼가 밀려 나온다. 밀려 나온다는 표현이 어울릴 만큼 돼지의 분만은 조용하고 그저 시간 간격을 두고 한 마리씩 태어난다. 육중한 어미가 산통에 몸을 잘못 움직이기라도 한다면 새끼는 숨을 거두기도 한다. 그래서 인부들은 주의 깊게 출산을 지켜본다.

그렇게 열 두 마리나 혹은 그 이상의 새끼가 태어난다. 그 날은 몇 마리가 태어났을까? 기억나지 않는다. 조용한 긴장 속에 출산이 끝나고 아버지와 인부들은 축사 한 켠의 숙소에 모여 무언가를 기다리는 눈치였다. 얼마쯤 지나자 따뜻한 음식을 내왔다. 조촐한 상차림이었지만 다들 얼굴이 밝아졌다. 몇 사람은 술잔을 기울이며 두런두런 이야기 꽃을 피웠다. 내 온 요리는 '애저'였다. 출산 중에 살아남지 못한 새끼 돼지였다. 양념이랄 것도 없고 요리답게 조리된 것은 아니었지만 고기는 부드러웠고 맛은 담백했다. 애저란 것이 음식점에서 제대로 만들면 값비싼 요리가 되기도 한다는 건 어른이 된 뒤 어디선가 요리 프로그램 따위에서 들은 것 같다. 열두어 마리의 새끼돼지가 태어나던 스산한 겨울밤 같은 곳에서 죽은 채로 태어난 새끼는 따뜻한 요리가 되어 출산을 돕던 인부들에게 대접되었다.

어미 돼지는 살아남은 새끼들에게 젖꼭지를 물린 채 어떤 생각을 했을까? 삶과 죽음은 그렇게 가까웠다. 도심에 조금 떨어진 겨울 들녘 한 복판의 농장에선 침침한 백열등 아래서 나는 애저 맛을 처음 보았다. 그 후로 애저를 먹을 기회는 다시 찾아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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