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달팽이 여자

하라주쿠 역전의 단상

by Jay


곧 죽을 것 같았다. 나는 일으켜 세우는 대신 바라본다. 메이지 신궁에서 내려오는 길이 분명했다.

하라주쿠 역 앞에서 성년식을 맞은 아이들이 하나비 마냥 공중으로 웃음을 터뜨렸다.

여인은 어지러운 게 분명해 보였다.

우산은 가늘고 길었으나 하이쿠처럼 살집이 생략된 몸을 지탱하기에 적당했다.


“이봐요, 술은 그러니까 戌時를 지나서 마시는 게 도의지요. 그렇잖으면 개처럼 기게 된다니까요.”


긴자에서 늙었다는 마담은 그러면서도 해거름도 못 되어 취한 내게 연신 權酌하였다.

선술집 창 곁으로 여자의 몸이 다 사라지는 데는 한참이 걸렸다.

그 사이 수제 오뎅이 누렇게 튀겨져 나왔다. 옆 테이블에는 산토리가 일으킨 취기가 이내

‘히사메’ 한 가락으로 토해지고 있었다.

이쪽 테이블에도 어김없이 한 병이 날라졌다.


“달팽이 같은 여자로군.”


농을 받을 일 없이 혼자 취하기로 작정하였으나 나도 모르게 입술을 비집고 나온 말이었다.


“가타츠무리라… 재미있군요. 한국 남자들은 사쿠라 같은 여자라고 수작 걸지 않나요?”


나는 테이블 다리를 구두코로 툭툭 건드리며 히사메 곡조에 잠깐 올라탔다가 이내 미끄러져 내렸다.

틀렸다. 일본여자는 단박에 죽어도 좋다는 감정 따위는 모른다.

단지 크게 끄덕이고 온몸을 오므려 안길 뿐이다. 달팽이 같은 여자라는 말보다 더한 찬사는 없다.

사쿠라가 흥취라면 달팽이는 미련이다. 지나간 자리에 남은 진액마냥 끈적이는 추억이다.

남자는 사랑이 아니라 미련 때문에 죽는 것이기에 잔상은 실체보다 강하고 두려운 것이었다.


“그러더니 와락 하고 안기더군. 아, 처음이 아닌 게 분명하다니까.”


집으로 깃들 수 없는 낡은 영혼들이 갓 스물을 넘긴 사환을 안주삼아 정점으로 치닫고 있었다.

비틀거리며 또 다리를 절며 여인은 어디로 사라졌나.

나는 그 느린 여자가 오모테산도의 디오르 숍 유리벽을 기어오르는 상상에 사로잡혔다.

애초에 다리라는 것은 모르는 듯 걸었으니 정말 달팽이일지도 모른다. 수직으로 솟은 욕망을 발견하면

온통 진액과 냄새를 뿌리며 타고 오르는 달팽이.

나는 진저리치는 대신 고개를 돌려 여자가 지나간 쪽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시선은 한 치도 뻗지 못하고 뿌연 벽에 부딪힌다. 사람들이 뱉은 말의 습도는 놀라웠다.

열고 들어올 때만 해도 오키나와 블루처럼 투명했던 유리문이 온통 젖었다.


“정말 달팽이 여자라도 있나 봐요.”


마담이 환풍기 줄을 당기며 무심하게 잔을 채워준다.

모든 사내를 빈 술병처럼 들었다 놓았다 한 적이 있었겠지. 병을 드는 여자의 손목이 경쾌하다.

일어날 시간이다. 여느 때처럼 테이블에 돈을 놓는 대신 마담의 손 위에 구겨진 지폐를 쥐어준다.

돈이 건네지는 찰나 잠시 손끝이 잡혔다 풀리는 힘을 느낀다.

칼날처럼 창을 그으며 물방울들이 수직으로 추락한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어머니의 어머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