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중해를 건너온 사내와의 문답
“영혼은 눈으로부터 빠져나갑니다. 그러니 눈을 창이라고 하는 것도 그리 낡은 수사는 아니지요. 창은 그 사람이 태어날 때 그리고 죽음을 맞이할 때 진정으로 열리는 것이지요. 일생에 두 번 그 창이 열릴 때 우리는 생명의 진정한 무게를 느낄 수 있어요. 그 무게는 바람에 실려 오는 향기와 더해져 짙고 깊은 소금향을 풍기죠. ‘플레르 드 셀’ 프랑스엔 그런 소금이 있다고 했어요. 소금꽃. 후각이 아니라 온몸의 촉각에 새겨지는 짠맛이지요. 아니, 짜지 않기 위해 존재하는 소금이라면 믿겠어요?”
백지를 쏘아보다 취기를 동력 삼아 한두 자 써볼까 술을 사러 나선 길. 좁은 골목을 느적이며 걷다 구멍가게로 들어서는 찰나, 석주처럼 단단한 근육의 남자가 나를 멈춰 세운다. 이 사람은 어디에서 왔나. 그을린 피부와 지중햇빛 눈동자는 이국적이나 언어는 고스란히 뇌리로 스며든다. 길옆에 오래 서 있던 가로수와 소녀들이 햇살에 무방비로 노출되는 정오. 나는 그 이방의 남자를 밀쳐내는 대신 눈과 어깨를 바라본다. 남자는 태어나는 게 아니라 길러진다는, 게르만의 격언이 떠올랐다. 타인과의 거리를 섣불리 좁혀버리는 이런 모험은 즐겁지 않다. 더 나쁠 것도 없는 일진이지만 어쨌든 막무가내로 쏟아붓는 누군가의 이야기는. 하지만 풀리지 않는 소설의 첫 문장에 시달린 터라 나는 그냥 이 갑작스러운 해프닝을 집필의 작은 거리로 삼아 보기로 했다.
"창문이니 소금이니 그런 장황함이란 쓸모없지 않나요? 아니, 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도대체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이죠?"
무관심에 시비의 조를 섞어 말했지만 짐짓 얼어붙은 집필의 발화점을 건드려 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손끝이 잘게 떨리기 시작했다. 업 없이 노니는 글쟁이의 일상은 퍽퍽하다. 사랑하는 여인은 떠났고 나는 술 취해 타자기 앞에 앉고서야 비굴한 고백과 자책의 원고지를 채울 수 있었다. 취기를 핑계 삼고 싶었지만 '깨어있는 당신이 더 가혹했다'는 그녀의 말이 섬뜩하게 나를 흔들어 깨웠다. 낡은 기억의 한 깃을 물고 추억을 도착하는 지금, 한 줄의 글만이 나를 구원할 수 있다. 세상에 없었던 단 한 줄.
"누구인가는 중요하지 않아요. 그 사람이 하는 말과 어깨의 곡선 그리고 뒤돌아설 때 이는 옅은 바람의 춤선을 기억한다면 말이지요. 결국 우리는 사람이 아니라 그런 작고 본능적인 순간에 취할 뿐이란 걸 알아야 해요. 아니 만질 수 없고 안을 수 없고 낮밤으로 뿜어내는 향기에 취할 수 없다면 그 알량한 인내니 용서니 하는 말들이 대체 무슨 소용이란 말입니까."
건장한 검색원 같이 내 앞에 버티고 선 그 남자의 막무가내와 시간의 강건함 앞에서 나는 조금씩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늙은 카니발의 수장처럼 냉소와 비난에 익숙해지며. 온몸의 모서리를 내어주며 조금씩 그의 이야기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같이 죽어도 좋다고 생각했어요, 그만큼 함께 하기를 바라면서.'
나도 모르는 사이 가게 앞 낡은 의자에 몸을 걸치며 나는 이 낯선 사내에게 고백했다.
“좋아요. 아니, 처음부터 모든 고백은 아름답고 고결한 문장이지요. 이렇게 생각해 봅시다. 만약에 박물관 같은 곳에서 함께 죽기를 원하는 연인이 있다고 말이죠. 그것이 사랑입니다. 그것이 사랑이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시간의 마모를 용서하는 유일한 공간에서 누군들 죽기를 바라지 않겠어요. 거기 죽은 사람들을 깨워 잔인하게 회고되게 만든 것은 과학이 아니라 사랑이 부패하지 않기를 원하는 연인들이지요. 가족이요? 가족이 서로의 유전자를 사랑한다는 것은 도킨스의 기만일 뿐이에요. 자신과 닮은 사람을 대체 누가 사랑하겠어요. 사람은 유일하기를 원합니다. 유일하다는 것만큼 사랑받는 이유도 없지요. 그런데도 가족을 사랑하라, 용서하라 하는 목사들은 먼저 제물로 올라야 해요. 오, 그 신의 사생아들에게도 신의 가호가 있기를.”
내게 사랑은 무엇이었나. 한때의 뜨거운 나였다면 '함께 죽는 것'이라 했겠지. 하지만 사랑은 함께 죽는 것이 아니다. 오직 굳건히 살아 추억하는 것이다. 그녀의 머릿속에 살아남아 밤을 잠식하고 욕망을 빼앗는 것이다. 그러니 아름다운 것은 사랑이 아니다. 오롯이 추악한 본능을 안아주는 것, 순찰을 겁내지 않는 도둑이 되는 것이야말로 사랑이다. 갑자기 첫 자음과 엉성한 이야기의 얼개가 떠오르며 나는 조급해졌다. 의자를 밀쳐내며 일어나 실로 오랜만에 달리기 시작한다. 남자는 아직 뒤에 남아 중얼거린다. 이건 그러니까 그리스가 아닌 조금 전 서울에서 일어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