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국의 겨울이여 다시 한번
“이봐, 젊은 손님. 지금 생맥주만 거푸 석 잔이지?”
여기는 아오바요코초(青葉横丁), 그러니까 시즈오카 시내의 명물 오뎅거리. 홍등이 늘어선 골목의 초입 첫 가게에 성급히 자리를 잡고 앉는다. 어제는 온천으로 몸과 마음을 덥혔으니 오늘은 맥주로 식히며 적당한 중용의 묘를 찾을 때다. 안주보다 먼저 맥주, 무슨 일이 있어도 생맥주다. 한 잔, 두 잔, 석 잔. 오토시(お通し, 주문 전에 내놓는 기본 안주)만 받아두고 별다른 주문도 없이 들이켠다. 그즈음 거뜬히 일흔은 넘겼을 주인장이 호쾌한 목 넘김을 격려하듯, 주문을 종용하는 심사를 슬쩍 얹어서 한 마디 던지는 것이다.
“그런가요, 벌써. 어제 즐긴 온천의 열기 덕분인지 한겨울에도 역시 맥주네요.”
마시는 만큼 매상일 테지만 왠지 어르신을 부리는 못돼먹은 술꾼이 된 것 같아 멋쩍다. 외워둔 메뉴 몇 가지를 읊어본다. 곧 접시 위에 동그란 한펜(はんぺん, 일본 관동 특히 시즈오카 명물 오뎅의 일종)과 오뎅 몇 덩이 그리고 잘 익은 무 한 조각이 담겨 나온다.
“아, 스지(筋, 소 힘줄 부위)를 잊었네요. 잘 익은 스지도 하나 추가.”
그리곤 조미도 없이 한펜 가장자리를 한 모금 덥석 베어 문다. 기대보다는 퍼석하지만 캐주얼하게 타협하지 않는 투박한 질감이 안주로 제격이다. 이어서 접시 위에 보태어진 스지를 집어 든다. 묵직한 손맛에 기대도 따라서 올라간다. 맥주 한 모금으로 한펜의 식감을 지워내고 천천히 씹으며 잇몸의 압박에 집중한다. 고기와 비계의 비율이 절묘하다. 좋은 고기와 능숙한 노포의 하모니가 빚어낸 고졸미가 정겹다. 고소하고 깊은 육향에 끌려 다시 한 모금.
“그 잔으론 안 되겠어, 비우고 주문하는 새 흥이 깨지거든. 2,000cc 올림픽 사이즈 어때요?”
주인장이 어느새 트로피마냥 묵직한 맥주잔을 꺼내 보인다. 다가올 올림픽 시즌에 맞춘 맥주 회사의 영리한 프로모션인데 그간 제대로 된 생맥주 귀신이 없어 먼지가 쌓였다는 한탄마저 정겹다. 그렇다면 ‘비꾸(Big의 일본식 발음) 사이즈’로 기분 좋게 또 한 잔 추가다.
이쯤 되자 작은 주점 안의 시선이 모여든다. 서툴지만 주문만은 능숙하게 해내는 일본어 실력도 신기한 낌새다. 취기도 적당히 올랐다. 지금, 예닐곱이면 다 차버리는 공간에 토박이와 이방인이 쳐둔 쓸데없는 견제의 벽을 걷을 때이다. 좌중에 인사를 건네고 건배를 청한다. 낡은 인연과의 잡담일랑 젖혀두고 순식간에 크고 작은 술잔들이 허공으로 치솟는다. 주종과 잔의 경계를 넘어 각자의 술이 순식간에 교차한다. 유리잔의 타격음만큼이나 시즈오카 사람, 호쾌하다.
“이 리듬, 단골로선 꽤 빠르지만 사실 즐겁네요. 늘상 주당들끼리 들으나마나 한 일상이나 주고받던
참이었는데.”
구석에서 연신 사케를 들이켜던 중년의 단골도 경계를 풀고 낯선 흥청거림에 기꺼이 올라탄다. 도쿄와 달리 태평양에 면한 이즈반도 사람들은 순박하고 쾌활하다. 괜한 긴장을 부르는 냉담한 세련미 대신 한펜처럼 팍팍한 듯 털털한 시즈오카 사람이 점점 더 좋아진다. 권작이 이어지며 작은 오뎅집은 시나브로 뜨끈하고 끈적한 공기로 가득해지고, 유리문에 서린 이슬이 세로쓰기로 이 순간을 타전하며 새로운 손님들을 불러들인다.
이방인이기에 용서받는 이 순수한 관용과 격려는 나를 거듭 떠나게 하는 힘이다. 이윽고 트인 대화의 물꼬는 나이와 취미 같은 낡은 고백에서 시작해 지역의 술과 사랑 그리고 시즈오카의 해풍이 키워낸 소설가 세리자와 고지로(芹沢光治良)까지 가 닿는다.
‘오직 사랑과 치유에 천착한 그의 인류애, 이 작은 선술집에서 실현되다.’
문학노트 지면을 할퀴듯 갈겨쓰고는 지금부터 기록도 기억도 없이 오로지 술잔의 커브, 그 굴곡의 매혹을 붙들고 취하기로 결심한다. 시즈오카의 물은 온천으로 온몸을 어루만지다 해풍의 소금기로 머릿속을 휘저어놓더니 오늘은 술로 익어 한 남자의 과잉 자존을 식혀준다. 좌석은 비었다 다시 채워져도 한번 데워진 온도는 꺾일 줄 모른다. 이윽고 좌중의 술잔이 비는 리듬마저 한점에서 만난다.
“여기 한 잔 더, 그리고 모두에게도.”
취기가 부른 호기로움과 이국의 언어에 갇힌 외로움이 적절히 뒤엉킨 이 밤의 질감이 아름답다. 문밖으로 겨울바람이 치닫는 2018년 12월 한겨울. 물방울 서린 유리문 너머로 루미나리에 불빛이 화사하다. 하지만 문명이 만개시킨 겨울 사쿠라는 내버려 두기로 한다. 갓 문을 열고 들어서는 여인의 사각거리는 서늘한 옷깃이 내 뺨을 스치는 지금은.
2018. 1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