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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의 긴 터널을 지나 홋카이도 1

4년만의 공항과 그 전후의 사정들

by Jay
여행가방.jpg 여행가방을 채우는 일, 이건 세상에서 가장 즐거운 노동이다.


4년만의 국제선이다. 셀프체크인 기기 앞에 선다.

이국의 것들이 뒤섞인 공항의 냄새와 습도, '난 이걸 좋아했었지' 새삼 깨닫는다. 여행은 이렇게 이유보단 감각으로 나를 흔들고 손잡아 끈다. 왼쪽으로 창이 난 자리를 찾는다. 15A. 오직 왼쪽 창측. 이 하찮은 강박 앞에 무력하게 복종하는 순간 평화가 온몸을 충만하게 채운다.


국경 안에 머문 4년, 내게도 변화가 있었다. 마흔 초입에 회사를 그만두었다. 자전거 국토종주, 올레길 걷기로 핏줄에 엮인 역마살을 풀어보려 했지만 여의치 않았다. 생산이나 쓸모 없이 완벽하게 무용한 한해를 보냈고 조금씩 주어지는 일만 했다. 혼자 조금 게으르게 일하고 한결 적게 버는 삶은 늘 숫자 앞에서 초조해졌지만 아직은 괜찮다. 아니 이제야 '낮고 가볍고 쓸쓸하게' 사는 게 좋아지기 시작한 거겠지.

그러니까 이런저런 사정으로 해서, '다른 나라에서 마시는 생맥주 한 잔'은 지금의 내게 대단한 사치이자 이벤트인 셈이다. 홋카이도. 삿포로 행 이유는 이처럼 단출하고 눈물겹다.


커피 공항.jpg 프리랜서 4년차에게 공항의 커피 가격은 마냥 가볍지 않다. 그렇지만 이 하찮고 사랑스러운 사치를 생략할 순 없다.


다섯 시간이나 먼저 도착한 공항에서 나는 그간 잊었던 분위기를 학습하며 천천히 걷는다. 면세 주류와 향수 사이를 스치다보니 설레어 떠났다 헛헛하게 돌아왔던 몇몇 여행의 기억들이 소환된다.

열흘 가까이 맥주를 마시지 않았고, 그 시간만큼 좋지 않은 무릎으로 속보했다. 무기력하게 방치된 중년인 채 이국의 공항에 던져지고 싶지 않으니까. 보잘것 없는 자격지심이 나의 며칠을 그럭저럭 건강하고 무사하게 잡아주었다. 그러니 이 여행은 떠나기 전부터 내게 작동해 몸과 마음 모두 조금은 더 좋은 쪽으로 데려가 준 셈이다.


왼쪽 창.jpg '왼쪽 창가 좌석'은 내 여행의 강박 중 하나이다. 산맥처럼 세를 이루며 자리잡고 있는 구름의 형태조차 즐겁다.


지금 나는 그간 말라버린 설렘의 싹에 습도를 불어넣는다. 아직 죽지 않았다면, 동굴을 기어나와 나아갈 힘이 조금 더 남아있다면, 오늘 북해도의 골목과 사람들 사이를 기꺼이 돌아가고 실수하고 헤매일 수 있기를. 그런 나를 용서하며 내 유치한 욕망을 그것 그대로 조응할 수 있기를.

생각나는 이름들과 후회와 잔고의 결핍을 국경의 이곳에 내려둔다. 여행은 늘 무엇인가 이야기 해 주었다.

지금이라고, 멈추라고, 내버려두라고, 괜찮다고. 내게 주어질 새로운 순간과 문장들을 조심히 헤아려보며 다시 여행을 시작해 본다. 4년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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