멍청한 첫 마디와 가라아게 그리고 메리 크리스마스
“혹시 한국인도 괜찮나요?”
이처럼 멍청하고 소심한 질문을 나는 그날 이전에도 이후에도 한 적이 없다. 정치며 역사며 경제까지 일본의 억지가 극에 달하던 2018년 연말, 로컬 느낌 물씬 나는 오시아게의 술집 문 앞을 몇 번이나 지나치며 망설이다 ‘후읍’하고 한 차례 숨을 들이켠다.
지나치기엔 너무도 사랑스런 노포의 적당함 그러나 들어서기엔 ‘너무 먼 나라’에서 온 이방인의 낯가림이 양보 없이 맞서는 통에 오시아게스카이트리마에 역 앞에서 오가며 살피기를 30분. 슬슬 바닥 모를 우유부단에 지레 지치기 시작한다.
‘그러니 번번이 연애가 그 모양이지.’ ‘그 핑계로 연말이면 여지없이 공항으로 도피지’ 자아 성찰과 체념 사이 어디 즈음에서 들려 온 말은 단지 환청일까? 순간 차오른 한 줌 작은 오기를 뒷배 삼아 차게 식은 여닫이문 홈에 언 손가락을 건다. 그리고 단번에 왼쪽으로 밀어내며 위풍당당 처음 던진 말이 바야흐로 저 멍청한 대사라니.
‘드르륵’. 문을 연 순간 술집 안의 온기와 문밖의 냉기가 극한의 대비를 이루며 언 눈망울에 슬쩍 눈물이 맺힌다. 2018년 12월 24일, 그러니까 크리스마스이브의 일이다.
“음? 그런 멍청한 질문을 하는 손님이 있어? 어디서 박대나 당하고 다닌 거야?”
적당히 낡은 닷지 너머로 늠름한 풍체에 벗겨진 머리의 사장이 뜨거운 수건을 건네며 사람 좋은 웃음을 던진다. 그리곤 닷지 앞을 가득 채운 손님들을 좌우로 헤집으며 자리 하나를 만들어준다.
“여기 간판부터 완전 로컬이라 주눅 드네요. 게다가 빈 자리 하나 남은 술집이라니,
허들이 높아도 여간 높아야죠.”
‘낡은 술집에 걸맞은 시답잖은 잡담뿐이라 지겨웠는데 잘 왔어’ 홀대와 환영을 한 문장에 말아내는 사장의 재담에 모든 피로와 우려가 씻겨 내려간다. 테이블과 닷지까지 정원은 10명 안쪽. 40대에서 60대에 이르는 단골들의 속도가 편안하다.
대체로 한 명의 이야기를 경청하며 순서를 정해 화제를 잇는 방식도 평화롭다. 무리한 농담이나 과한 음주는 단호하게 응징하는 사장의 개입이 노련하다. 역시 ‘とりあえず 生(토리아에즈 나마: 우선 생맥주부터)’다. 그리고 첫 안주는 무난하게 치킨 가라아게로.
“이 봐요, 손님. 날고기도 뜯어먹게 생긴 나지만 이래 봬도 여기 야사이(채소) 전문 술집이라고.
굳이 가라아게라면 타코도 괜찮아?”
무안해진 김에 의뭉스레 오른손을 들어 보이곤 “그럼 추천 메뉴 3가지!” 하며 의연한 듯 대응한다. 드디어 내 눈앞에 놓인 맥주 한 잔. 그리고 조촐한 안주를 내려다본다. 뭔가 감격스럽다. 새벽의 공항과 이국의 역전에서 헤맨 시간들, 막중한 허들을 넘은 뿌듯함에 보람찬 첫 모금을 들이켠다. 오늘 이국의 취객 옆자리는 사유리 씨의 차지이다 <히비노 사>의 음향감독인 그녀가 구글번역기로 좌중과 이방인을 열심히 중계해 준다.
“사유리 씨, 고맙습니다. 무슨 만화 같은 환영인지 모를 일이네요. 실연 후의 크리스마스이브도 이쯤이면 나쁘지 않네요.”
“크리스마스이브니까 특별한 날이잖아. 다들 그러길 기대하고. 그래도 이런 술집은 어제 같은 오늘이거든. Jay는 선물처럼 즐거운 이변이야. 얼마나 좋아. 당신 덕분에 덤으로 새로운 세상을 만나고 대화하는 지금이.”
이야기 나누는 가운데 몇 순배의 잔이 오가자 술집은 어느새 나가는 이도 들어오는 이도 없어 어떤 결계로 둘러싸인다. ‘멍청했지만 최선이었어. 그리고 또 그러면서 조금 더 자란 것 같고.’
차갑게 언 창문에 뿌옇게 스민 습도가 세상의 시간과 취객의 시간 사이를 갈라놓고 이국의 언어가 가슴 언저리에 차곡차곡 쌓이는 밤. 그 위에 젖고 구겨진 내 마음을 한 편을 꺼내어 말려본다.
지금 저 눈길 위를 총총거리며 집으로 가는 소녀와 어머니 그리고 집 밖을 헤매는 이들 모두 메리 크리스마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