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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의 긴 터널을 지나 홋카이도 2

아찔한 소탈과 따스함, 오타루의 술집 골목 렌가 요코초에서 1차

by Jay
렌가 입구.jpg 오타루의 아케이드형 시장 한 켠에 자리하고 있는 술집 골목, 렌가 요코초. 오픈은 오후 5시 무렵이다. 오픈을 기다리며 입구에 놓인 피아노를 연주하는 단골의 낭만과 여유가 멋스럽다


홋카이도. 그 중에서도 오타루의 시장 언저리 낡은 선술집 골목, ‘렌가 요코초’다. 오타루 역에 내려 숙소로 향하는 길에 일찌감지 점찍어 놓은 술집 골목이다. 아니 도착한 2시 전후로 오픈했다면 점찍는 대신 벌써 한잔 기울이고 있었을 테지만.


성급하다 이름난 북해도의 겨울은 오후 5시, 이방인의 걸음걸음 사이를 헤집으며 달아오른 기대와 조급증을 식혀준다. 그래, 조금은 쌀쌀한 이런 날씨가 좋다. 날씨 핑계로 자켓에 타이, 외투까지 갖추고 이방인 티 없이 스며들 수 있으니까. 거기 적당히 담백한 눈인사를 건네는 것으로 통과의례는 충분하다.


“실례합니다, 혼자인데 괜찮을까요?”


언제쯤 새로운 입장 멘트를 장착할 수 있을까? 하지만 이미 뭉게뭉게 단골들이 피워올린 화제와 취기의 아우라를 휘저으며 악센트 높게 치고 드는 것은 좋지 않다.


“어서오세요, 어디든지 앉아요, 여기 편안하게 구석으로.”


외투를 걸어두고 돌아 앉는데 일제히 바라보는 시선의 온도가 느껴진다. 오늘의 사장님은 마마(보통 일본에선 남사장은 마스터, 여사장은 마마로 통칭한다). 둥글고 평화로운 포용과 호기심, 따스하다. 오늘은 여기서 취해도 좋다. 확신이 든다.


마마상 가게.jpg 한류 팬인 마마상은 앉기도 전에 BTS의 최애를 묻는다. 신구와 토박이 외지인의 비율이 좋아 대화가 끊이지 않는 소박한 일본 정서 그대로의 코노지다.


다시 생맥주 답사를 시작하기까지 4년, 무려 그만큼이 지났다. 코로나 동안 국경의 안에서 웅크리며 버텼다. 술을 좋아하지만 짝 없이 혼자 마시며 취할 만 한 동굴 같은 가게나 사람을 기어이 찾지 못했다. 그래서 또 걷어낼 수 없을 복잡한 심경과 불편의 그늘에도 불구하고 다시 가깝고도 먼 나라, 이곳으로 길을 잡게 된 것이다. 혼자서도 기꺼이 마시는 술꾼들의 나라로. 가볍게 테이블을 스캔하는데 주종은 다양해도 안주는 대부분 채소류 아니면 오뎅이다.


"다이콘(무), 오뎅 하나씩. 그리고 타마고(계란)도 주세요."


오후 5시에서 5시 30분이면 문을 여는 오타루의 술꾼 집합소, 렌가 요코초. 가게 수는 10여 개 남짓. 서양풍 요리부터 일본술 중심의 정통 사케집, 비장탄으로 근교 특산 해산물과 채소를 구워내는 숯불구이집까지 구성이 좋다.

오픈 시간은 5시에서 5시 30분, 밤 10시에서 11시가 되면 문을 닫는다. 새벽까지 달리는 술꾼에겐 아쉽지만 밀도 높은 대화와 어깨가 닿을 듯한 밀집도가 취기를 한결 올려주고 흥을 돋운다.


렌가 가게 소개.jpg 열 곳 남짓한 가게들의 메뉴와 정서가 모두 달라 투어하는 즐거움도 각별하다. 술꾼이라면 렌가 요코초로 반나절 오타루 여행을 채워도 좋다.


Jay: "역시 이 코노지 스타일, 편안하고 좋네요."


마마: "어머, 코노지를 아세요, 그럼 일본에서도 꽤나 마셔봤겠네요! 아니, 어디어디서 취해봤는지 이야기

좀 해 봐요"


Jay: "남으론 가고시마부터 도쿄에 이르기까지 곳곳, 그리고 오늘은 여기 홋카이도죠."


일본의 이자카야의 구조를 일컫는 단어 중에 ‘코노지’가 있다. 우리말로 풀면 '디귿자 모양의 술집'이다. 주인장을 중심으로 테이블과 의자가 감싸듯 배치되어 있는 구조가 편안하고, 자연스레 교차되는 시선도 정겹다.


삿포로 클라시쿠.jpg 오직 홋카이도에서만 즐길 수 있는 생맥주, 삿포로 클라시쿠. 쌉쌀하고 묵직한 본연의 맥주 맛이란 무엇인지 다시 상기시켜 준다. 이 맥주만으로 삿포로 여행의 보람은 충분하다.


술은 역시 생맥주다. 홋카이도에서는 지역 특산, ‘삿포로 클라시쿠(클래식)’다. 카라구치, 씁쓸하면서도 싸한 첫맛에 피니시도 제법 길고 넘어가는 무게감도 묵직한데, 우리 맥주가 미적지근하다 타박하는 술꾼들에게는 제격이다. 일본의 전국을 누비며 에비스, 기린, 산토리 생맥주와 온갖 지역 수제 생맥주를 섭렵하고 다닌 나도 클라시쿠 앞에서는 그저 ‘휴욱’ 휘파람 불듯 매운 맛 피니쉬를 내뿜으며 고개를 끄덕일 뿐이다.


Jay: "이 클라시쿠, 위스키 만큼이나 묵직하고 위험하네요, 이러다 곧 취해버릴 것 같아요."


마마: "오뎅 안주에는 니혼슈도 좋죠, 카라쿠치 뒷맛이 조금 텁텁하다 싶을 땐 유자 베이스 사케도 개운하고."


주종을 바꾼다는 말에 여기저기 추천이 쏟아진다. 한 잔 권하며 시음을 청하는 친절에도 불구하고 생맥주 성애자는 몇 초 고민하는 척 갸웃거리다 다시 나마비루다.


렌가 정경.jpg 해가 훌쩍 넘어가고 본격적인 술꾼들의 시간. 쌀쌀한 날씨와 따스한 홍동의 대조가 술맛을 돋운다.


오타루의 명소는 운하이고 그 주변으로 크고 작은 투어 스폿과 상가들이 자리하고 있다. 당연히 붐비는 것도 그 쪽이라 상대적으로 '렌가'는 외지인이 적은 편이다. 렌가를 발견하기 전에 운하 근처 술집 골목 몇 군데를 살폈는데 이방인과 이방인으로 채워지는 가게는 흥청이는 경쾌함은 좋지만 지역다움이 없어 가볍고 헛헛했다.


로컬 술집은 가게마다 특유의 정서가 있고 손님들의 주인의식도 단단해 넉넉하게 타지인을 보듬는 관용이 좋다. 개인사와 어우러지는 지역의 역사와 한탄을 듣는 것도, 오랜 인연이 보장하는 마마와 손님 간의 옥신각신을 지켜보는 일도 즐겁고 유쾌하다.


그래서 또 오늘밤은 한 곳으로 그칠 수 없는 일, 좌중의 리듬이 느슨해지고 오래 대화하던 몇몇이 일어서는 타이밍에 기대어 함께 계산을 청한다. 다음 목표는 미리 봐둔 비장탄 구이집. 문틈 사이로 비집고 나오는 웃음소리가 맑고 높다. 이제 겨우 7시, 술꾼의 시계는 술시부터 본격 작동하는 법. 심기일전 운하에서 불어오는 찬 바람으로 속을 가시고 다시 시작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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