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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nday Writer Sep 03. 2023

기록의 쓸모를 체험하다

서울시립미술 아카이브를 다녀와서

‘기록의 쓸모’ 라는 제목의 책이 있다.

책이 있다는 걸 알 뿐  읽어 본 적은 없다.

‘기록’이라는 단어를 입력하고 나니 저절로 연상이 되었다.


오늘 다녀온 전시회가 기록의 쓸모를 아주 잘 대변해주고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서울시립미술관 아카이브라는 공간이 있다는 걸 인스타그램을 통해서 알았다.

이 공간의 쓸모는 기록을 모으고 보관하고 공개하고 전시한다는 데에 있다.

지금은 화가 ‘김용익‘의 컬렉션이 진행중이다. 미술전이 아니라 ‘컬렉션’이다.


현대 미술사도, 화가도 잘 모르는 채로 관람을 시작했다.

초기 1970년대 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화가의 작품자체 보다는 그의 전 작업세계를 아울러 아카이빙 해놓은 전시라 할 수 있다.


아들은 자기에게는 잘 안맞는 전시라고 했지만, 나는 흥미로웠다.


전시회에는 텍스트가 빼곡했다.

작품은 처음의 탄생 그대로가 아니라 시간이 지나면서 덧칠되고 그 위에 화가의 글이 덧씌어 있기도 했다.

다른 예술인들과 소통했던 글, 전시회를 준비하는 과정의 기록들, 낙서같은 일기와 그림들, 교수활동을 하며 쓴 기고문들

전시를 감상한다기 보단, 화가의 세계관을 글로 읽어 내는 활동이었다.


나는 읽고 보고 있는데, 마치 화가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를 열고 듣고 있는 기분이었다.


무엇보다 재미었던 건 천장이 높은 벽면 전체를 A4 용지들로 가득히 전시한 부분이었다.

그 종이들은 모두 이면지다. 뒷면은 어느 전시회 견적, 공문, 기고문 같은 내용들이다. 작가는 공문을 이면지로 활용해 일기도 쓰고, 그림도 그렸다.

누구나 그럴 수 있다. 그렇게 이면지에 지금 꿀꿀한 기분을 끄적거릴 수도 있고, 눈 앞의 풍경을 그려낼 수도 있고, 문득 떠오른 아이디어를 재빨리 메모해 놓을 수도 있다.

하지만, 누구나 이렇게 전시를 할수는 없는 일이다.

당장 내게 그런 결과물들이 있고 벽면 한가득 모아 전시를 한다면 누가 봐주기나 할까


50여년 오랜시간 일구어온 작가의 예술 정신과 도전, 그 작업세계를 풀어놓는 과정에서 그렇게 차곡차곡 켜켜이 쌓아온 기록들이 또 하나의 세계를 창조해 내는 과정으로 읽혔다.


80년대 금강미술전시회에 참여한 작가는 당시의 승차권, 작업사진, 금강변의 모래까지 고스란히 보관을 했고 그 기록이 40년이 지난 내 앞에 너무나 선명하게 드러나 있다.

어떻게 보관을 했기에 그 오래된 승차권이 하나 바래지 않을 수가 있는지...

서울에서 공주까지 버스요금 1,660원, 지금 평일 프리미엄 버스가 7% 할인해서 딱 그 10배다.

신문기사 하나 하나, 작업노트, 화첩, 이면지들을 고스란히 제대로 보관하기 위한 작가의 수고가 어땠을지 나는 잘 짐작을 못하겠다.


요즘은 글도, 그림도, 사진도 디지털로 작업하고 보관한다. 대량생산도 가능하고 복제도 쉽다. 클라우드 서비스로 대용량 파일들도 언제든 보관하고 이용할 수 있다.

어쩌면 아카이빙은 더욱 쉬워졌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넘쳐나는 그 생산물들을 제대로 정리할 시간이 없다.

내 사진첩의 사진, 인스타그램의 글들은 체계가 없이 산만하다. 생산만 할 뿐 제대로된 정리를 못한 탓이겠다. 기획도 없이 그때그때 만들어 내기만 한 이유이다.

개인의 일상에 뭐 그리 거창한 기획이 필요하겠느냐만은

어쩌면 아무것도 안될 수 있는 기록물, 소장물들이 3차원의 역사책이 된 듯 펼쳐져 나에게 다가온 순간,

나도 ‘내 삶을 좀 더 분류하고 정리해야 하지 않겠느냐’ 라는 반문 혹은 반성의 시간을 잠시 가져보게 되었다는 것이다.


#한줄요역 : 어제에 이어 오늘도 ‘정리‘가 내 화두가 되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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