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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리 Oct 29. 2022

어차피 치킨을 튀길 운명인 것을

사람을 급으로 나누고 차별하는 사람들


  동생이 치킨을 사 왔다. 다이어트를 해야 한다고 생각만 하고 어느새 집어 먹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또 어딘가에서 개업했나 보다. 촉촉하다는 거 외에는 다른 집 치킨과 크게 다를 것이 없는 맛이었다. 고만고만한 맛이어도 치킨은 언제나 맛있다.      


  퇴직하면 창업이 기정 사실화되어 있는 사람들이 태반이다. 그리고 만만한 게 치킨집이다. 노무사라는 전문직을 원했던 것은 결혼 유무 혹은 배우자의 생존과 처지에 상관없이 내 전문지식으로 밥을 벌어먹고 살고 싶은 이유가 컸다. 그리고 일말의 지적 허영심도 포함되어 있다. 직업만 들어도 ‘공부 잘했구나!’ 소리를 듣고 싶었고 돈과 시간과 인생을 들이부어 대학에서 고생해서 공부했던 만큼 그곳에서 배웠던 것들을 조금이라도 써먹고 싶었다. 더불어 근무 관계에서 생기는 여러 마찰을 법적으로 해결하고 선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직업이었다. 이러한 내 생각은 이론적으로는 크게 흠결이 없는 듯했다. 이렇게 노무사는 내게 여러 욕망의 복합체였다.     


  그 욕망을 이루기 위해서는 평범한 회사원으로 살 수 없었다. 대기업이란 곳에서는 마흔 전후에 소위 희망퇴직이라는 이름만 희망찬 칼바람을 휘두르며 사람을 내치는 것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퇴직하면 대부분 그간 모아둔 돈으로 치킨을 튀기기 마련이었다. 치킨은 내 입에 들어갈 때나 즐거운 것이지 남 입에 넣어주기 위해 수고를 하고 싶은 것이 아니었다. 그렇게 나는 철저히 내 욕망을 이유로 노무사 자격증 취득의 길을 택했다. 창업하기는 부담스럽고 회사원은 위태위태하니 그때는 그 선택이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학기 중에 하루 두 시간 이상 잔 적이 거의 없을 정도로 과제량은 살인적이었고 학점도 짜디짠 학교를 휴학도 없이 다녔기 때문에 바로 제대로 된 곳에 취업하기는 무리였다. 원하지도 않았고 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공부할 시간을 확보하려면 어딘가에 정직원으로 일하기는 어려웠다. 칼퇴근을 할 수 있는 제대로 된 직장은 많지 않기 때문이다. 공기업이나 공무원 정도인데 사실 이러한 곳들도 근무부처에 따라 야근이 비일비재하다. 그러다 보니 계약직이나 명목상 정규직이지만 비정규직보다 못한 사무직을 전전했다. 그렇게 수험과 직장을 병행했다.     


  담당 교수님은 휴학을 한 번도 하지 않은 나에게 졸업 연기를 권하셨다. 서울은 힘들더라도 지방에 있는 대기업이나 공기업에는 가야 한다는 것이 교수님의 입장이었다. 하지만 나는 학교에 더 머물고 싶지 않았다. 그곳은 상처와 고통이 덕지덕지 묻어있는 곳이었다. 대학은 내게 있어 고작 학점 때문에 상대의 감정을 무시하고 거짓말과 욕설, 그리고 책임 회피도 불사하는 곳이었다. 근무가 결정된 날 고용지원센터에서 계약직으로 일하게 됐다고 교수님께 메일을 보냈다. 교수님은 내가 일하는 자리를 못내 아쉬워하셨다. 우수한 학생인데 그 자리에서 일하는 것은 아깝다고 하셨다.      


  하지만 그 우수한 이라는 단어가 기쁘다기보다는 못내 마음에 저몄다. 우수하다는 소리를 듣기 위해 감정 상해가며 하기 싫은 과제나 공부를 꾸역꾸역 해야 했고, 그 과정에서 너무나 많은 눈물을 흘려야 했기 때문이다. 교수님께서는 내가 더 좋은 자리에서 시작하기를 바라셨기에 안타까운 듯한 모습을 비치셨지만 그래도 응원해주시고 개인 연락처를 주셨다. 그렇게 졸업한 다음 달 고용지원센터에서 계약직으로 처음 사회인이 되었다.    


  IMF 당시 경제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설립된 급부행정기관 고용지원센터에는 당시 인력이 부족했다. 그래서 고용 상담사 자격증이 있는 사람들이 센터 자체 시험을 보고 일정 점수가 넘으면 고용 상담사 직렬 공무원이 될 수 있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공무원 시험 합격으로 임용되는 공무원과 다르게 말이다.     


  그런데 행정직 공무원과 고용 상담사 직렬 공무원 사이의 차별이 있었다. 공무원이 된 경로를 두고 자기들끼리 뭉치는 분위기였다. 그리고 무려 성분이 다르다는 말로 표현하신 분이 계셨는데 그분은 전국에서 유일한 정년을 앞둔 7급 공무원이었다. 벌써 6급을 달았어야 했는데 일을 너무 안 해서 승진을 못 했다고 들었다. 더불어 그 편한 운영지원부에서 음란 영상물을 보다가 걸려서 센터장님이 일이 제법 많은 편에 속하는 우리 부서로 쫓아냈지만, 여전히 아무것도 안 하고 이상한 소리만 늘어놓고 있을 따름이었다.      


  그때 나는 추가로 합격해서 다른 동기들보다 근무 시작일이 한 달 정도 늦었다. 그런 나를 같은 기수 계약직 중 한 명이 2기 계약직들이 들어오자 자신은 1 기고 나는 1.5기라고 불렀다. 위부터 아래까지 되지도 않는 유치한 차별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공무원들 생일마다 케이크가 하나씩 나왔지만, 계약직은 아니었다. 고작 만 원 남짓한 걸로 사람 서럽게 하는 방법도 가지가지란 생각이 들었다. 그것도 노동부에서 말이다. 세금 다 어디다 쓰고 이러는지 모르겠다. 여기가 이러면 다른 데는 더 하다는 소리다.      


  어차피 퇴직하면 치킨을 튀길 운명들이 목에 달린 사원증으로 사람을 차별했다. 기껏해야 1급 노비, 2급 노비, 3급 노비 정도로 구분해놓은 것뿐인데 말이다. ‘나는 1급 노비라고, 귀하신 몸이지!’라며 자신들의 목에 걸린 노비의 증표를 자랑했다.      


  그 잘난 노비 증표 좀 더 좋은 것이라고 목에 힘줄 필요도 위축될 필요도 없고, 자신의 가치가 가려질 이유는 더더욱 없는 거 같은데 말이다. 인생의 어느 단편만을 가지고 판단해버리기에는 인간은 생각보다 그렇게 시시한 존재가 아니다. 하지만 그런 유치한 짓거리를 지켜봐야 했고, 무시와 수모를 감내해야 하는 일이 툭하면 일어났지만, 툭 하고 털어내기 쉽지 않은 날이 많았다. 인생의 팔 할은 이토록 고통이지만 오늘도 치킨은 맛있다.


이미지 출처_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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