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리 Oct 29. 2022

패배자 선언

사회적 기준을 들이대며 구성원을 패배자로 만드는 세상

  아빠가 동생에게 훈계했다. 뭔가 반칙하는 느낌이었다. 아빠의 유일한 장점이 잔소리 내지 훈계하지 않는 것인데 말이다. 이제 아빠에게 도대체 뭘 기대해야 할지 모르겠다. 아빠는 수의대 진학 실패 후 방황하는 동생에게 자리도 잡고 연애도 하고 결혼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언제까지 그렇게 패배자처럼 살 거냐고 말했다.      


  아빠가 선을 넘은 순간이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아빠가 그러면 안 되는 것이었다. 아빠는 어느 순간부터 별다른 이유 없이 가장으로서의 경제적 책임을 지는 둥 마는 둥 하고 있었으며 거의 책임을 안 진 기간도 상당했다. 더불어 이유 없는 분노 폭발에 폭력을 쓸 때도 있었다. 아빠가 잔소리 안 해서 좋다기보다는 염치가 있으면 잔소리를 안 해야 할 거 같았다.      


  동생은 부당한 말을 듣고 끽소리도 못 하는 성격이 아니다. 그렇다고 분노를 폭발하듯 표출하지도 않는다. 그 말을 듣더니 평소와 다름없이 점잖게 나 같은 사람을 세상 사람들이 패배자라고 부른다면 자신은 기꺼이 패배자가 되겠다고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아빠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아빠는 동생에게 그 말을 한 날 늦게 사과했다고 한다. 나는 평생 아빠에게서 사과를 들어본 적이 없다. 아빠는 사과할 줄 모르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나이대마다 사회적으로 기대되는 모습이 있다. 대학, 취업, 결혼, 출산과 같은 것들 말이다. 해당 나이대에 그 모습을 하고 있지 않으면 여지없이 비난의 대상이 된다. 일말의 씹을 거리를 발견한 사람들은 먹이를 발견한 포식자들처럼 사회적 기준에 조금이라도 어긋난 사람을 물어뜯는다. 패. 배. 자.라는 단어도 서슴지 않고 쓰고 말이다.      


  사회적으로 기대되는 모습 중에서 꼭 해야 하는 건 적어도 지금 내 눈에는 없어 보인다. 남의 인생에 훈수를 두는 건 해당 인생을 영위하는 자의 동의 없이는 지극히 무례한 일이다. 해서는 안 되는 일이 아닐까 싶은데 너무도 당연하게 일어나는 일이다. 썩 그렇게 바람직해 보이지는 않는다.


  그나저나 평생 훈계만은 안 하고 살던 아빠가 왜 그랬을까.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늦게나마 다른 아빠들 흉내를 내고 싶었던 걸까. 훈계 말고 다른 아빠들의 부성애를 좀 흉내 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보기도 했다. 하지만 이내 받아보지 못했던 것을 어떻게 흉내를 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가능하다손 치더라도 그건 꽤 어려운 일일 것이다. 그리고 그 어려운 일 바라지 않는다. 다만, 아빠가 지녀왔던 유일한 장점을 다시 찾았으면 좋겠다.     


  예전에는 세상의 기준에 조금이라도 맞지 않거나 뒤처지면 두려움을 느끼곤 했다. 그래서 사람들의 걱정돼서 해주는 말이라며 사실은 괴롭히는 말에 일일이 신경 쓰이고 마음이 아팠다. 그럴 필요 없었는데 말이다.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기준에 뒤처질까 전전긍긍하는 성공한 사람보다 나만의 기준을 만들어가는 패배자가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 그래, 나는 지금 패배자다. 그게 뭐 어때서.  


이미지 출처_Pixabay


이전 08화 어차피 치킨을 튀길 운명인 것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