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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리 Feb 29. 2024

감정을 해독하는 법

감정의 주인이 되기 위해서


 일상에서 오는 스트레스의 팔 할은 인간관계인 거 같다. 저 사람은 왜 저럴까 하는 의문이 들 때가 종종 있으나 결국 답이 나오지 않을 때가 많다. 거듭 생각해봐도 이해되지 않는 일은 굳이 이해하려고 애쓰지 않는 편이 정신 건강에 이로울지도 모르겠다.     


 나는 내 글에 대한 객관적인 평을 얻기 위해 여러 글쓰기 모임에 참여해왔다. 그 글쓰기 모임 중 하나는 코로나 이전부터 치유 상담 프로그램을 진행하던 사람이 진행하는 글쓰기 모임으로 예전에 그 사람이 진행하던 치유 프로그램에 참여했던 적이 있다. 그 사람과 거리감을 멀찍하게 유지했으나 알기는 오래 알았던 사람이다.     

 그 사람이 주최하는 글쓰기 모임에 참여해서 몇 달간 지내다가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는데 마지막 대화 때 내 글에 엄청난 악평을 쏟아냈다. 한참을 자기 말만 하다가 나중에는 이런 일은 글을 대하다 보면 흔한 일이라며 다시 잘 지내자고 하는데 이미 당할 때까지 당해버린 나는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비슷한 일이 전에도 몇 번 있었으나 ‘별로 안 친했어도 오래 알았으니까, 잘해주니까’ 등의 이유로 무마해왔다. 하지만 내 글이 장점이라고는 한 톨도 없는 쓰레기라고 면전에서 한 시간도 넘게 일방적으로 우겨대는 사람과는 계속 관계를 유지할 수 없었다. 내 글이 쓰레기도 아니고 말이다. 가스라이팅 강의를 하는 사람이 나를 가스라이팅 하고 있었다. 직업이나 일이 그 사람을 모두 설명할 수는 없었다. 사람은 이토록 개별적이다.     


 나한테 한 짓은 괘씸하지만 내가 미워해봤자 그 사람은 너무 멀쩡하게 잘살고 있었다. 괜히 내 안에 미움만 품는 꼴이었다. 미움이란 독과 같아서 누군가를 미워할 때 마음에는 독이 퍼진다. 독에 감염된 우리는 슬퍼하고 분노한다. 내 감정인데 내가 어떻게 하지 못해 앓는다. 내 안에 독을 품게 된 것이다. 혹은 나에게 고통을 준 사람처럼 타인에게 고통을 준다. 타인에게 독을 뿜는다.


 보여지는 모습이 조금 다를지라도 상태는 똑같다. 감정의 노예가 된 것이다. 마치 좀비가 좀비를 만들 듯 말이다. 좀비한테 당해서 좀비가 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노예도 좀비도 되지 않을 수 있을까. 당장 주인은 못 될지라도 말이다.      


 일차적인 방법으로 내 감정이 요동칠 때 그러니까 내게 들어온 독성물질이 흩어질 수 있게끔 감정을 진정시킬 시간이 필요하다. 감정의 깊이에 따라 시간만 주어도 쉬이 흩어질 감정이 있고 그러지 못할 감정도 있을 것이다. 그럼 나는 시간이 지나도 해결되지 않고 남은 있는 독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나를 힘들게 하고 아파하는 사람이 변화하기를 기다리는 것은 거의 다음 생을 기약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가장 가깝고 가장 쉽게 변화할 수 있는 존재가 있는데 그게 바로 나다. 내게 독을 준 것은 다른 사람일지언정 그 독을 해독할 수 있는 건 독을 준 사람이 아니라 바로 나다. 타인이 바뀌어 버리는 거의 가능성이 없는 일을 바라기에 내가 감정의 주인이 될 수가 없는 것이었다.      


 나를 힘들게 하면 대화도 해보고 적당히 시간을 두고 만나기도 하다가 그래도 안 되면 헤어지면 된다. 우리나라 속담에도 있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는 거라고. 다만, 헤어지든 멀어지든 귀한 내 마음에 독을 남겨둬서는 안 될 것이다. 당장은 힘들더라도 더러 시간이 걸리는 독이 있을 지라도 결국에는 내 마음 속에 독을 비워내야 한다.      


 비워내기 위해서 그 사람이 왜 저렇게 다른 사람을 아프게 하는 사람이 되었는지를 생각해봤다. 부모님의 기질적인 문제라든가 척박한 가정환경이라든가 하는 이유로 보통 사람보다 공감을 알기 어려웠을 것이다. 같은 조건에서 안 그런 사람도 있겠지만 그러질 못했고. 감당할 만큼의 힘이 없어서 마음의 힘이 약해졌던 그때 악해진 거라고.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고 다 알 수도 없는 일이었지만 그렇게 내 안에서 나름의 생각을 정리해보았다. 그렇게 애도의 시간이 지나갔다.     


 그럴 수도 있지 하고 그 사람의 한계와 결과를 그러려니 해주는 것. 역지사지를 모르는 이들에게 받은 상처를 역지사지를 아는 내가 그 사람들을 위해서가 아닌 내 마음을 지키고 보호하기 위해 기꺼이 역지사지하는 것.  내 마음은 내가 적극적으로 보호해야 하는 것었다. 가만둬서는 이리 승냥이떼와 같은 이들이 달려들어 할퀴어대기 일쑤였다.     


 그렇게 나에게서 해결책이 나올 때 더 이상 그들을 미워하느라 내 마음 속을 무겁게 하지 않을 때 나는 그리고 우리는 감정에 잡아먹히지 않고 감정의 주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 사람에 대한 감정이 희미해진 요즘 글쓰기 모임은 아니고 인스타에서 만나 같이 글을 쓰던 분이 오랜만에 연락을 해서 내 개인 저서의 가제가 멋지다며 칭찬을 해주셨다. 그 가제 나에게 악평을 쏟아내던 그 사람이 만들어 준 것이었다.      


 예전의 나 같았으면 악착같이 다른 제목을 썼겠지만 제목 제법 괜찮아서 진짜 제목 나오기 전까지 그냥 쓰기로 했다. 나름의 애도의 시간을 보내고 나면 좋은 건 좋은 거대로 남기도 한다. 딴에는 나를 생각해 준 부분도 있구나 하고.      


 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건 그 사람에게 보내는 사랑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 사람이 그런 것에 그러려니 할 수 있는 건 정말 의외였는데 그게 바로 용서라고 한다. 악은 악으로 갚는 것이 아니었다.


이미지 출처_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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