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를 가려면 내려간다고 해야 할까, 올라간다고 해야 할까. 육지가 먼저일까, 섬이 먼저일까. 당연히 육지가 먼저겠지. 제주도를 다녀온 뒤 이런 생각으로 일문일답을 해 본다.
우리 가족은 지난해부터 다 같이 제주에 한 번 다녀오자는 얘기가 있었다. 코로나로 인해 미루고 미루다가 이번에 큰애가 급하게 일주일 전에 가족여행 날짜를 결정 후 통보를 해 왔다. 제주도로 간다는 것 외에 꼭 가야 하는 장소는 정하지 않았다. 갑자기 잡은 일정 때문에 비행기표 구하기가 힘들었다. 큰애는 서울에서 출발하고 우리 부부와 작은애는 사천에서 출발하기로 했다. 비행기표를 구하지 못해서 어쩔 수 없이 우리 부부는 오전에 출발하고 작은애는 오후에 출발하는 걸로 계획을 세웠다. 다행히도 출발 전 날 취소 표를 구해서 오전에 세명이 함께 같은 비행기에 탑승할 수 있었다.
첫째 날 오전
함덕해수욕장(조천읍 함덕리)
공항 인근에서 렌터카로 우리가 지낼 숙소로 이동 중 함덕해수욕장에 잠깐 들렀다. 도착하자마자 해수욕장의 하얀 모래에 온통 시선을 빼앗겼다. 하얀 모래는 바닷물의 색에 명암을 넣어 아름답고 눈부시게 만들었다. 모래사장 위쪽 야트막한 언덕에서 시야에 들어온 넓은 바다를 보며 하얀 모래가 많은 곳의 물이 더 옅게 보일 거란 생각을 했다. 모래를 밟아 보고 만져보니 부서진 아주 작은 조개 조각들이 보였다. 궁금해서 인터넷을 뒤졌다. 하얀 모래는 패사층(조개껍데기가 바람과 파도에 의해 부서져서 만들어진 모래층)이었다. 바닷물은 패사층 위에 살짝 덮어 놓은 듯 수심은 얕았다. 걸어서 걸어서 바다로 바다로 들어가는 느낌. 누군가 붙잡지 않으면 앞으로 앞으로 옅은 색의 물에서 짙은색의 물을 지나 먼바다로 스며들어갈 것 같았다.
아름다움과 이국적인 해수욕장의 풍경은 물속으로 빨리 들어오지 않고 뭐 하냐는 듯 끌림이 있었다. 눈으로만 구경하기엔 아니다 싶었는지 남편은 입고 있던 옷 그대로 물로 들어가 수영을 했고, 두 딸은 긴바지를 동동 걷어 올린 뒤 포즈란 포즈는 다 취했다. 남편은 두 딸의 이름을 부르며 자신만의 물놀이를 하고 두 딸은 엄마도 물에 들어오라며 불러댔다. 난 가족들의 그런 모습을 사진으로 담기에 바빴다. 먼저 두 딸을 사진에 담고 아이들을 흐뭇하게 바라보는 남편의 모습으로 여백을 채웠다. 이런 사진 찍기가 재밌다. 서로를 바라보며 뭔가를 하는 모습. 난 남편과 두 딸을 뒤따라 걸으면서 사진을 자주 찍는다. 셋이 자연스럽게 한 자리씩 차지하며 어우러지는 사진으로. 우리는 신나게 놀고 나서 서로의 발등과 종아리에 달라붙어있는 하얀 모래를 털어주며 함덕해수욕장을 남겨둔 채 숙소로 향했다.
첫째 날 오후
숙소(애월읍 고내리)
여행을 가자고 하면 큰애는 숙소 정하는 것에 정성을 가장 많이 쏟는다. 숙소의 가격은 항상 우리 부부가 생각한 적정 금액을 웃돈다. 비용을 걱정하는 나에게 작은애는 숙소를 기대해도 될 거라며 귀띔을 해 준다. 숙소 앞 좁은 골목길 돌담 아래 주차를 하고 돌담을 살짝 돌아서 들어간 이 집에서 첫눈에 들어온 빗살 대문, 그 안에 잔디 마당, 오른쪽엔 길이는 짧지만 누워도 될 만큼의 폭이 있는 나무 마루, 왼쪽엔 또 다른 큼직한 빗살 나무 문. 빗살 사이로 살짝살짝 보이는 이 집의 비밀스러운 공간들이 점점 궁금증을 더해 갔다. 숨바꼭질을 해도 재미있을 것 같다. 대문 입구에 서서 작은 마당을 지나 내부로 들어가자 양쪽으로 방, 마루, 기둥, 천장이 딱 일본식이다. 재미있는 것은 양쪽 마루와 마루를 건널 수 있게끔 이동식 나무다리가 놓여 있다는 것. 자꾸 나무다리를 건너고 싶어질 것 같다. 마루를 지나 문을 열고 안채 밖으로 나가자 눈앞에 노천탕이 있다.
노천탕은 오래된 빨래터와우물을만난 것처럼 좀 더 가까이 기까이 다가가고 싶어졌다. 노천탕을 가까이서 보자 내가 알고 있는 몇 군데의 정겨운 빨래터가 떠올랐다. 그중에서도 순천 낙안읍성 빨래터는 잊을 수 없는 곳이다. 모처럼 부모님을 모시고 간 낙안읍성에서 지금 보다 조금 더 젊고 건강한 엄마는 손수건을 바닥에 놓고 엉덩이를 들었다 놨다 하면서 빨래하는 시늉을 했다. 길을 지나가던 노년층의 사람들은 개울가에서 빨래하는 척하는 엄마의 장난기에 한참을 웃고 떠들었다. 엄마는 더 크게 웃었다. 언젠가부터 난 빨래터에 새로운 관심이 많아졌다. 빨래터, 그곳에는 고단함과 고통의 이야기가 수북이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우리 가족은 집안 곳곳을 돌아보며 나무가 지닌 아름다움과 노천탕을 좋아하게 되었고, 집주인의 아름다운 공간 활용과 배치, 소품 하나하나에 들인 섬세함을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 편안하고 아늑했다. 이 집에서 머문 우리의 하루는 여행을 한다는 느낌보다 성인인 두 딸이 어려지고, 중년이 된 우리 부부가 어린 두 딸의 젊은 부모로 돌아간 느낌이었다.
둘째 날 오전
(아직 애월읍 고내리)
아침잠 없는 남편과 난 일찍 해안가로 산책을 나갔다. 우리 부부는 새로운 것을 좋아 하기에 전날 밤에 걷던 곳과는 반대의 길로 나섰다. 관광객이 붐비던 밤과는 전혀 다른 조용한 어촌을 만날 수 있었다. 숙소로 되돌아오는 길에 우린 마을 뒤편 나지막한 산을 동시에 봤고 서로의 눈빛을 교환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산을 향해 방향을 틀어 걷고 있었다. 걸으며 어촌 마을 제주의 밭에서 자라고 있는 푸른 채소들을 유심히 봤다. 토질 때문인지, 시기가 그래서인지 대부분 밭에는 비슷한 모양의 채소가 자라고 있었다. 심은 지 얼마안 된 새싹도 있고, 새싹보다는 조금 크고 다 자라지 않은 중간 크기의 채소도 보였다. 돌 틈 사이로, 돌담 너머로 언뜻 봐서인지 정확한 이름은 잘 모르겠다. 집과 집 사이의 좁은 골목길을 지나서 오르고 올랐지만 산으로 가는 길을 찾지 못해서 산 바로 아래에서 서성거리다 아쉽긴 했지만 포기하고 내려왔다. 우리가 가려던 산은 고내봉(175m)이었다.
아침 산책 후 전날 아껴 두었던 노천탕에 들어갔더니 더 좋았다. 온천수를 덮고 있는 세 조각(혼자서는 들 수 없는 크기와 무게)의 묵직한 나무 덮개를 열자 김이 피어 올라왔다. 어린 날, 추운 겨울 마을 사람들의 식수원이던 우물가에 배를 깔고 뒤꿈치를 든 채 우물을 들여다보면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던 그 장면이 연상되었다. 적당한 크기와 깊이의 노천탕이었다. 항상 45도를 유지한다는 물의 온도는 적당히 기분 좋게 만들었다. 노천탕 주위를 둘러싼 화산석과 어울리는 손잡이 달린 나무 물바가지가 감성을 끌어올렸다. 탕의 물 위에 둥둥 떠 다니는 바가지의 올록볼록한 손잡이를 붙잡고 큰애가 켜 둔 음악을 들으며 몸과 마음 풀기에 들어갔다.
둘째 날 오전
감귤밭(해안동)
다음 일정은 전날 먹고 싶어서 사려고 했던 감귤을 직접 따러 가기로 했다. 감귤 따기 체험을 위한 감귤 밭은 숙소에서 20분가량 소요되는 곳으로 정했다. 평소에 과일나무에 매달려 있는 과일을 따서 먹는 걸 좋아하는 난 기대감에 부풀었다. 1인당 7천 원씩을 지불하고 들어간 감귤 따기 체험의 시작은 2kg의 감귤이 담길만한 철 바케스 두 개와 각자 가위 하나씩을 받아 들고 감귤밭에 진입. 이왕이면 맛있는 걸로 바케스를 채우기 위해 일단 나무 사이를 누비며 시식을 했다. 너무 커도 안되고, 작아도 안되고 맛이 싱거워도 안되고 껍질이 두꺼워도 안된다며 서로 맛있는 감귤로 채우길 원했다. 감귤 밭은 하나인데 감귤의 크기와 맛은 제각각이었다. 사진 찍고, 감귤 실컷 먹고 두 손 무겁게 감귤을 챙겨 왔다. 재미는 있는데 날씨가 더워서인지 땀이 줄줄 흘렀다. 더위도 식힐 겸 다음 목적지는 시원한 만장굴로 정했다.
둘째 날 오후
만장굴(구좌읍 동김녕리)
동굴 입구에서 서로를 바라본 우리 가족의 옷과 신발은 동굴과 전혀 맞지 않는 차림새였다. 굽이 낮은 신발, 밑창이 미끄러운 신발, 때 묻기 쉽고 거추장스러운 롱 원피스까지 거기에 더해 색상은 거의 흰색. 하지만 사진 찍기에는 최고였다. 어둠 속 동굴의 벽은 용암이 흘러내린 흔적들로 결이 생기고 젖은 듯 촉촉해 보여 만져보면 부드러운 부분도 있었다. 걸어가는 곳마다 조명에 비친 천정은 위로 깊게 파인 곳이 있고 낮게 내려와 부딪치지 않게 조심해서 지나가야 하는 곳도 있었다. 천정에서는 군데군데 물이 떨어지고 바닥은 그 물로 미끄러웠다. 조심스럽게 한 발짝 한 발짝 걸을 때마다 서로의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어둠 속에서 넘어지지 않도록 손을 잡고 발걸음을 맞추면서 끝내 마음까지 맞추고 말았다. 동굴의 끝을 지나 계단을 올라가니 나뭇가지 사이로 환하게 비추는 햇살은 눈을 찡그리게 만들었다. 신세계로 나오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며 우린 끝을 통해 시작과 마주 했다.
둘째 날 오후
풍차 해안도로(한경면 신창리)
두 번째 숙소 도착. 첫 번째 숙소만큼은 아니었지만 나름 괜찮았다. 숙소 앞 풍차 해안가에서 부랴부랴 순식간에 물속으로 가라앉고 있는 석양을 배경 삼아 사진을 찍었다. 석양은 아주 잠깐 풍차와 바다를 조금 더 호화스러운 풍광으로 만들더니 금세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숙소로 돌아와 제주의 마지막 밤에 맛볼 숯불구이 준비를 위해 장을 보러 나섰다. 한경농협. 제주에서 두 번째 들린 농협 하나로마트다. 첫 번째는 애월 농협마트. 제주 농협 하나로마트에서는 빈 박스를 비치해 두지 않아서 장을 본 물건을 쓰레기봉투에 담아서 왔다. 테라스에서 남편은 숯불에 고기를 굽고 세 여자는 구워 준 고기를 맛있게 먹었다. 집이 아닌 여행을 나와서 남편이 구워 준 첫 번째 고기라서 더 맛이 좋았다. 숯불향에 취한 고기는 입에서 살살 녹고 숙소 주변으로 보이는 풍차는 멋진 분위기를 더했다.
셋째 날 이른 오전
금오름(아직 한경면 신창리)
전날 가족 모두가 약속한 시간 아침 5시 30분에 금오름에 갈 채비가 완료되었다. 해가 뜨기 전에 가야 한다고 서둘렀다. 숙소에서 20여분 걸렸다. 날이 아직 환하게 밝지는 않았는데 우리 앞에 일행 몇 팀이 휴대폰 후레시를 이용해서 불을 밝히며 앞서 가고 있었다. 그들의 뒤를 따라 약간 올라가다 보니 분홍빛으로 변해가는 풍경을 볼 수 있었다. 올라갈수록 날은 밝아지고 사람들이 많아졌다. 금오름에 도착해서 사진으로 추억을 남기고 평상에 앉아서 멀리 말이 뛰어다니는 모습을 보며 맞지, 여기가 제주지 싶었다.다시 숙소행 짐을 챙겨서 서귀포 쪽으로 가기로 했다.
셋째 날 이른 오전
협재해수욕장(한림읍 협재리)
작은애는 전날부터 제주 바닷가에서 수영을 꼭 할 거라고 했다. 금오름에서 내려와 협재 해수욕장에 도착하자마자 입고 있던 옷 그대로 바닷물로 들어갔다. 편안하고 푹신한 침대에 눕듯이 바닷물 위에 떠서 배영을 몇 번 하고선 만족스러운지 물 밖으로 나왔다. 수영을 한다기보다는 맑고 투명한 물속에 몸과 마음을 살짝 담금질하고 나온 듯 보였다. 작은애는 소원 성취했다.
셋째 날 이른 오후
면 맛집(서귀포시 대포동)
서귀포에서는 맛집에 가기로 했다. 내비게이션 안내자는 전날도 그랬듯 같은 장소 다른 길을 가르쳐 주거나, 아예 다른 장소로 안내했다. 길을 잘못 안내해서 생각지도 못한 곳을 구경하기도 했다. 돌고 돌아서 기대감에 도착한 맛집에선 친절한 사장님이 우리를 반겼다. 고기는 부드럽고 냉면 육수는 감귤향이 나면서 맛있었다. 사장님의 싹싹하고 친절한 인사를 넘치게 받은 뒤 식당을 나왔다. 남편은 밥 먹고 더우니까 시원한 1100 고지에 가자고 했다.
셋째 날 오후
1100 고지(서귀포시 색달동)
람사르 습지에 등록되어 있는 1100 고지 산 습지의 생태탐방로를 걸으면서 두 딸은 산행이 아니면서 고지대에서 사는 식물과 습지를 볼 수 있어서 좋다고 했다. 특히 무엇보다 시원해서 더 좋다고 했다.
셋째 날 오후
공항 가는 길(제주시 용담3동)
공항으로 가는 차 안에서 작은애(제주 여행이 처음이다)에게 제주 여행 중에 어떤 것이 가장 기억에 남느냐고 했더니, 아빠가 숯불에 구워 준 첫 번째 고기 한 점이라고 한다. 남편이 고기 구운 보람이 있다.제주도를 여행하면서 우리 가족은 김만덕을 얘기했고, 해수욕장의 하얀 모래와 아름다운 물빛, 검은 돌, 바위를 보며 생성 과정을 얘기했다. 하얀 모래 때문에 물빛이 달라 보이는 거라고. 용암이 서서히 흘러 내려가 바닷가에 이르기까지 그 여정 중에 녹아내린 생명체는 얼마나 많았을까 안타까워했다. 펄펄 끓어 넘치던 용암이 지나간 자리에는 완만한 지형이 만들어지고 그곳에 검은색 토양에서 잘 자랄 수 있는 식물이 자라고 있겠지. 해안가 마을 좁은 골목길마다 집터와 텃밭을 에워싼 화산석. 골다공증 환자의 뼛속처럼 구멍이 있어서일까 전혀 무게감이 느껴지지 않는다고 했다. 그래서일까 일부 사람들은 화산석과 화산석 사이를 시멘트로 발라서 틈새를 메웠다. 튼튼해 보이긴 하는데 제주스럽진 않다고 생각했다. 공항으로 가는 도중에 비행기 탑승 시간이 남아서 잠깐 해안가에 내렸다. 남편은 제주에서의 마지막 해안가 화산석 위를 걸으며 짧게 얼마나 뜨거웠을까 라고 들릴 듯 말 듯 혼잣말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