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낮이다. 하필 이 무더운 시간에. 자연 바람을 찾아 나선다. 바람이 불어와 다행스럽긴 하나 덥긴 덥다. 목적지에 가는 길에 꼭 가 보고 싶은 곳이 있다. 남편과 마음이 통했는지 남편이 먼저 그곳으로 향한다. 동생과 난 어린애가 엄마 뒤를 졸졸 따라가듯이 남편 뒤를 따라간다.
전날 간 카페에서 마음을 뺏긴 건 카페의 인테리어와 음악, 자몽차, 팥빙수가 아니었다. 카페 옆 연못 저 끝에 있는 팔각정이다. 오늘 그 팔각정을 찾아왔다. 세월을 이고 지고 살아가는 나이 든 소나무들이 자연스러운 자태를 뽐내며 둘러싸고 있는 곳. 이곳의 소나무와 시원하고 부드러운 바람은 빨리 오지 왜 이제야 왔냐며 우리를 반긴다. 역시 생각했던 그 이상으로 좋다. 오길 참 잘했다.
우리보다 앞서 백발의 할머니가 팔각정 나무바닥에 베개를 하고 누워 있다. 셋은 주인에게 허락을 맡듯 팔각정 주변을 쭈뼛거린다. 할머니는 우리의 목소리를 듣고는 '여기 올라와서 쉬었다 가시게!' 하고, 우리는 할머니 말에 "예" 하고 그 말만 기다렸다는 듯이 몇 개 되지 않은 나무 계단을 후다닥 올라간다. 할머니는 다시 우리에게 '여기 바닥에 누워봐 시원해서 좋아! 어서 누워봐!' 바닥에 누워보면 좋다고 자꾸 누우라고 재촉한다. 우리는 '네' 하고는 못 이긴 척하다가 나무 마룻바닥에 자기 집 안방에서 눕듯이 벌러덩 눕는다. 좋긴 좋다. 너무 좋다. 오래전 시골집 나무 마루 틈새로 한쪽 눈을 감고 유심히 내려다보면, 갓 태어난 예닐곱 마리의 강아지가 보이던 그 나무 마루에 누워있는 착각이 든다. 나무 마루 아래 그 어떤 좋은 것이 존재할 것만 같은 곳이다.
할머니는 '이거 머리에 베고 누워봐'하며 1.5리터 물이 가득 들어있는 생수병 하나씩을 건넨다. 생수병을 받아서 목을 받치니 쏙 들어가서 높이가 딱 맞다. 물이 담겨 있어서 무게감도 있고, 딱딱하지 않고 약간의 쿠션감이 있어서 좋고, 높이 조절은 물의 양으로 하면 되고, 쉽게 더러워지지 않고, 목이 마르면 물을 마실 수도 있다. 장점이 참 많다. 여기서 포인트 하나. 생수병은 사각 모양이어야 된다는 것. 집에서 사용하는 베개를 고를 때도 오래 베고 있어도 목이 아프지 않고, 수면에 방해가 되지 않는 걸로 신중하게 고르는 법인데. 누가 생각해 냈는지 '생수베개' 아이디어가 참 좋다.
잠깐 쉬려고 했는데 눈을 감고 목적지를 잊은 채 한참을 자연 바람과 새소리, 솔향에 취해 단잠을 잔다. 생수베개에 누워서 나뭇가지 사이로 내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는 햇볕을 모자로 가린 채 한참을 더 잔다. 시간이 흐를수록 목적지 대신 이곳에서 그냥 푹 쉬었다가 집으로 돌아갈까 하는 갈등이 생긴다. 아쉽지만 고민 끝에 조금 더 쉬다가 다시 목적지를 향해 가기로 한다.
좋은 곳에서 맛있는 거 나눠 먹으며 도란도란 얘기 나누면 좋을 텐데, 하필 간식을 가져오지 않은 날이다. 할머니에게 '다음에 이곳에 올 때는 간식거리를 꼭 챙겨 올게요' 인사를 한다. 할머니는 '말만 들어도 고맙네. 또 어디 갈 데가 있다며? 잘 다녀와!' 하며 아쉬운 인사를 한다.
다음에 이곳에서 할머니를 다시 만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팔각정이 있는 연못 방향으로 산책을 나갈 땐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가방에 간식을 꼭 준비해야겠다. 덤으로 책과 필기구도 넣어 두면, 마루에서 책을 읽고, 글을 써 보는 것도 괜찮을 듯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