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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를 아는 사람 Jul 19. 2023

첫 결혼기념일 선물과 함께 살고 있어요


남편은 선물을 무겁게 들고 퇴근을 한다. 한 팔에 걸쳐 받치고, 나머지 한 손으로 또 감싸고 있다.

'그게 뭐예요?라고 묻는 나에게

'선물!'이라며 화분을 내민다.

남편이 첫 번째 결혼기념일 선물로 난초 화분을 사 왔다. 예쁜 꽃다발은 기대도 안 했지만, 화분은 상상도 못 했다. 너무 놀라서 말문이 막힌다. 나의 반응을 살피던 남편은 '아니 그게 아니고 꽃은 금방 시들지만 화분은 죽지 않고 오래가잖아'그런다. 누가 현실주의자에 합리적인 사람 아니랄까 봐 표 나게 이럴 때가 있다. 말은 맞는 말이다.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어이없기도 하고 당황스러운 건 어쩔 수 없다.


그날부터 난초는 우리와 함께 살기 시작한다. 좋든, 싫든 한 가족이 된 것이다. 처음엔 꽃은 없고 푸른 잎만 있는 난초에 무신경했다. 하지만 세월이 갈수록 난초에 대한 생각이 바뀌어 간다. 안방에서 가장 눈에 띄는 곳에 자리 잡은 난 화분은 나의 동선 어디에서나 보인다. 바쁘게 지낼 때는 가끔, 여유가 생긴 날에는 자주 난초를 쳐다보게 된다. 아무리 못난 사람도 자꾸 보면 눈에 익어서 예뻐 보이는 것처럼, 난초도 자꾸 보니까 난초가 가진 좋은 점이 보이기 시작한다.


사군자 중 삐침을 가장 잘 살릴 수 있는 선의 아름다움이 돋보인다. 부드러우면서 반듯하지 않고 여유로운 곡선으로 잎의 끝까지 선의 수려한 모습을 지닌 난초. 잎은 뿌리에 가까울수록 가늘고 어느 지점에선 폭을 넓히면서 위로 올리다가 허리를 한번 꺾은 뒤 옆으로 부드럽게 내려앉는다. 언뜻 보기에는 끝이 뾰족하여 모난 듯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나름의 아름다움이 있다. 어디까지인지 모를 곳으로 뻗어낸 잎의 끝에는 밋밋하지 않게끔 연한 또 하나의 선이 감싸 안고 있다. 잎의 선 두 개의 합이 가진 조화는 우아함으로 비추어진다.


화분에 심겨 있는 난초는 몇 번의 분갈이를 거쳐 지금까지 우리 가족과 함께 있다. 난초는 우리 부부결혼기념일과 똑같이 나이를 먹었다. 처음에는 이, 삼 년에 한 번씩 피던 꽃이 지금은 피지 않는다. '난초가 꽃 필 때가 되었는데' 하고 꽃을 기대할 즈음이 되면, 기대에 부응이라도 하듯이 꽃을 피웠다. 꼬박꼬박 피던 난초에 이상이 생긴 것일까. 최근 몇 년 사이에는 꽃을 피우지 않고 있다. 남편은 '이제 난초가 나이를 많이 먹어서 꽃 피울 힘이 없을 거야'라고 한다.  말을 듣고 보니 난초의 상태가 좋지 않다. 이제는 자꾸만 아래로 고개를 떨구고 있는 모습이 우아함 대신 안쓰럽기만 하다.


처음 우리 집에 왔을 때 지녔던 온몸의 싱싱함과 열정은 잎의 폭이 줄고 옷 색이 어지면서 사라지고 있다. 서로의 어깨를 나란히 하며 채워졌던 아홉 개의 빽빽했던 잎의 사이는 여백이 많아진다. 잎이 그만큼 가늘어진 것이다. 아래로 떨군 고개는 겨우 버틸 수 있는 힘만 남아 있다. 영양제를 주사하고 정성을 다해도 점점 사라지는 기력을 보충해 주지 하고 있다. 난초가 우리와 함께 산 지 29년째다. 과연 난초는 우리 부부와 함께 몇 해를 더 견디며 살아갈지 그것이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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