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에는 수많은 나무들이 그들만의 이름으로 뿌리를 내리고 있다. 키는 작지만 단단한 나무, 나무껍질이 두꺼운 나무, 혼자서는 살 수 없어서 다른 나무에게 기대어 자라는 나무, 나무가 자랄수록 굵고 단단한 매듭이 생겨 볼썽사납게 보이는 나무, 사람의 손을 탄 듯, 반질반질 윤기가 흐르는 나무, 벗겨질 듯 벗겨질 듯 거친 외향을 지닌 소나무 등 나무들은 그렇게 그렇게 환경에 적응하며 잘 살아가고 있다.
그중 엄마품처럼 넉넉한 소나무 한 그루가 있다. 언덕을 가파르게 올라온 사람만이 만날 수 있는 나무다. 나무는 네다섯 개의 굵은 가지를 가지고 있는데 사람 품기를 바라기라도 하듯 옆으로 길게 늘어지다 위로 올라가 있다. 사람들이 포옹하려 할 때 취하는 포즈처럼 말이다. 가지 하나하나의 두께도 상당하다. 사람들은 땀을 잔뜩 흘리며 언덕을 올라 처음 만나는 이 소나무를 보면 바로 본능처럼 다가간다. 소나무의 팔에 엉덩이를 걸치고, 배로 눌러도 보고, 가지 위에 올라가서 사진도 찍는다. 숨을 고르는 것이다. 소나무 품에 안겨 휴식을 취한다. 소나무는 기다렸다는 듯 이팔 저 팔 다 내어준다. 쉬었다 가라고. 한숨 돌리라고 말하는 것 같다. 자연은 꾸미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내어 준다. 소나무는 받는 마음보다는 주는 마음이 강하게 느껴진다.
엄마품 같은 소나무만큼 특별하진 않지만 평범한 나무들 사이사이를 채우는 것이 있다. 잔풀. 풀숲에는 나무보다 훨씬 많은 잔풀들이 자리를 잡고 있다. 나뭇가지 사이로 새어 들어오는 빛을 받아 초록을 뿜어내는 어떤 풀잎들은 바위 옆에 끼여 시원한 골바람 때문인지 몸을 주체하지 못한다. 이리저리 흔들거리며 혼자서 팔랑거린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마구잡이로 흔든다. 비슷한 녀석들 사이에서 단연 돋보이는 순간이다. 잔풀들이 나무 아래에서 춤을 추며 나무를 품어 키우면, 나무는 하늘 향해 쭉쭉 뻗어가며 위에서 아래로 손을 흔든다. 함께라서 좋다고. 같이 오래도록 살자고.
휴일에 볼일을 보기 위해 집을 나선다. 도서관에 들렸는데 휴관이다. 생각 없이 3층까지 올라간다 곧바로 내려온다. 계단 좀 올라간다고 얼마나 더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턱 밑에 흐르는 땀을 훔치며 도서관 바로 앞에 있는 찻집에 들어간다. 우엉차를 사기 위함이다. 지난번에 방문했을 때 사장님이 우엉차를 구입 한 나를 세워두고 '몸이 아파서 그러는데 여기 의자에서 잠깐 쉬었다 계산해 드리면 안 될까요' 했던 얘기가 생각나서, 사장님한테 '몸은 괜찮으세요?'라고 물었더니 '기억해 줘서 고마워요'하며 냉커피 한 잔을 건네준다. '무료'라는 말을 덧붙이면서. 사장님도 나를 기억하고 있다는 말이다. 시원하게 커피 한 잔을 마시는데 사장님 표정이 좋다. '오늘 좋은 일 있으세요?' 하며 묻다가 한참 동안 수다를 떤다.
자기 건강 때문에 차를 챙겨 먹다가 찻집을 하게 되었다는 사장님. 그래서일까. 이곳 찻집은 좋은 제품에 수량면에서도 가격대비 저렴하다. 모든 조건이 단골이 된 이유이기도 하다. 사장님도 플러스. 사장님은 연륜 때문일까. 어린 사람들이 아직 숙성되지 않은 이야기나 행동을 하면 속으로 '아직 젊구나, 나도 저 땐 저랬지, 세월 가면 알게 된다'하면서 웃는다고 한다. 그 말이 내 맘에 쏙 든다. 타인의 언어나 행동 속에서 자기를 들여다본다는 것은 버릴 건 버리고 품을 건 품는다는 뜻이 아닐까. 삶의 노하우는 그냥 오는 것이 아니구나, 받아들이는 것이 다르구나 싶다. 인생은 배움의 연속이라는 그 말이 맞는 것 같다.
살면서 어떠한 인연으로 인해 만나게 된 사람들. 그중에서도 그 사람을 만나면 편안해지고, 편안해지면 자꾸 얘기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 품을 줄 아는 사람. 주는 느낌보다는 받는 느낌이 강하게 드는 사람. 보기만 해도 웃음이 나오고 행복한 사람 말이다. 인연이 만들어지는 건 하나의 주는 마음과 또 하나의 받는 마음이 더해져야 되는 것이 아닐까. 인연에 앞서 미련하게, 바보처럼, 셈이 약한 사람이라 호구로 취급당할지도 모르지만, 난 엄마품 소나무처럼 무엇 하나라도 줄 수 있는 사람으로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