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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를 아는 사람 Aug 22. 2023

한 입만 먹어 보라고 줬는데?

딸이 마라탕을 주문해서 남편과 사이좋게 나눠 먹고 있다. 이 모습을 보니 지난번 일이 생각나 웃음이 나면서도 2차전이 될까 봐 남편의 젓가락질에 시선이 간다.


딸과 여동생 우리 부부가 함께 아이쇼핑을 나간다. 이번 쇼핑 목적지는 산청 약초박물관. 건물 주변을 게 한 바퀴 산책하고 나니 배가 고프다. 이곳에서 배가 고프면 항상 우리가 먹는 음식이 있다. 갈비탕. 어김없이 갈비탕을 먹기 위해 식당으로 들어간다.


나나 : 여러분 먹고 싶은 거 있으면 얘기해 보세요?

딸이 : 아이 배고프다. 빨리 뭐 시켜 먹자!


모두 말이 없다.


나나 : 먹고 싶은 거 없으면 내가 알아서 주문합니다. 나중에 딴소리 없기요. 갈비탕 네 개 주세요!

딸이 : 나는 육회 비빔밥 먹을까?

나나 : 그래 먹고 싶은 거 먹어!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동생 : 형부도 먹고 싶은 걸로 주문하세요?

남편 : 아니야, 난 갈비탕 먹으면 돼.


갈비탕 3개, 육회 비빔밥 1개를 주문하고 기다린다. 잠시 후 맛있는 음식이 나오기 시작한다.


딸의 맞은편에 앉은 남편은 갈비탕을 먹고, 동생과 나도 남편과 같은 갈비탕을 먹고 있다. 남편은 갈비탕을 먹으면서도 눈은 자꾸만 딸의 육회 비빔밥에 가 있다. 그런 아빠를 눈치챈 딸이, 맛깔스럽게 비빈 육회 비빔밥을 몇 젓가락 먹다가 아빠를 쳐다보며,


딸이 : 아빠, 육회 비빔밥 맛 한 번 봐봐. 한 입 먹어봐?


남편은 딸이 내민 큼직한 비빔밥 그릇을 기다렸다는 듯이 가져간다. 아니 빼앗아간 느낌이다. 크게 한 젓갈 먹고 주려나 싶었는데, 또 한 젓갈, 그다음 한 젓가락, 남편의 젓가락질은 그릇의 육회 비빔밥이 흔적도 없이 사라질 때까지 계속된다. 남편의 팔꿈치 옆에는 먹다 만 갈비탕이 기다리고 있는데, 한 입만 먹어보라고 딸이 내민 비빔밥을 몽땅 먹어 버렸다.


딸의 표정이 일그러지기 시작한다. 그럴 만도 한 것이, 배고프다고 하면서도 아빠 생각해서 맛을 보여준 것인데 그걸 다 먹어 버리다니. 딸은 말도 못 하고 멍하니 텅텅 비어버린 비빔밥이 담겼던 그릇만 바라보고 있다. 차가운 스테인리스 그릇처럼 눈빛이 차가워지고 있다. 어이가 없고 화가 잔뜩 난 표정이다. 밥 먹는 테이블 분위기가 묘하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 했다. 이게 무슨 상황이람!


나나 : 먹고 싶으면 당신도 육회 비빔밥을 주문했어야지!, 먹고 싶은 거 있냐고 물을 때는 아무 말 없다가 딸이 먹을 밥을 다 먹어 버리면 어떡해요?

남편 : 내가 뭘?

나나 : 뭘 잘못했는지 모르겠어요?


남편의 이런 행동은 어린아이 같다. 이때의 남편은 아빠가 아닌 다른 사람의 모습 같다. 낯설다. 평소 배러심 많은 남편인데 가끔은 배려를 전혀 모르는 사람 같다.


딸은 아무거나 가리지 않고 잘 먹는 남편을 위해서 자기가 좋아하는 초콜릿이나 젤리, 불량식품을 자주 사다 준다. 남편은 딸이 사다 준 것은 다 맛있다고 잘 먹는다. 처음 접하는 음식도 딸이 사 주면 기존에 즐겨 먹던 음식처럼 맛있게 먹는다.


딸은 아빠를 늘 생각하고, 남편은 마음속으론 딸을 생각하지만 음식 앞에선 그 마음이 스르르 해제되는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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