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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를 아는 사람 Oct 25. 2023

꽃의 기억

꽃을 언제 처음 받았을까? 꽃의 기억은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먼저였다. 초등학교 시절 담임 선생님에게 꽃을 선물하고 싶었으나 돈이 없어서 고민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난 등굣길에 지천으로 피어있는 들국화를 툭툭 꺾어서 한아름의 꽃다발을 만든 뒤 평소 좋아하던 선생님께 드렸다. 얼굴은 부끄러움으로 붉은 노을처럼 빨갛게 물든 채 살포시 꽃다발을 내밀었다.

"선생님, 선물이에요!"

"아이, 예뻐라! 나한테 주는 거야? 고마워!"

선생님은 내 마음을 아시는지 기쁨을 감추질 못했다. 계절은 돌고 돌아 많이도 바뀌었지만, 들국화를 볼 때마다 어린 날 나에게 사랑을 보여 주셨던 선생님의 감사함을 떠올린다. 내가 선생님을 기억하듯이 선생님도 그때의 어설프고 촌스런 들국화 꽃다발을 기억하고 계실까?


특별한 날이 아니면 받기가 쉽지 않은 꽃. 들꽃과 달리 판매용 꽃은 화려함을 뽐내며 사람들의 시선을 붙잡지만 돈에 비해 실용적이지 못하다는 평을 받는다. 그도 그럴 것이 비싼 가격에 비해 싱싱함을 유지하는 기간은 너무 짧다. 꽃의 향기가 사라지기 전에 "꽃은 예쁜데 너무 빨리 시들어서 아까워"란 말이 꼬리처럼 붙는다.


내 나이 20대. 꽃을 보면 돈이 먼저 생각나던 시절. 꽃이란 걸 남자에게서 처음 받아 본 날. 아. 처음으로 받아 본 그 꽃에는 노란 프리지어의 은은한 향기도, 하다못해 은근하게 코 끝을 간질거리는 하얀 치자 꽃 향기도 없었다. 생기는 있었냐고. 당연히 없었다. 하지만 멜로디는 있었다. 영혼 없이 반복해서 나오는 멜로디.  이 꽃의 정체는 생기 품은 예쁜 생화가 아니라  향기 없는 빨간 모양만 장미인 조화였다.(꽃이 아닌 것이 꽃인척) 순간 할 말을 잃었다. 눈을 감아 보라고 할 땐, 얼마나 기대에 부풀었는데. 조화에 이렇게나 들떴다니. 참 오래된 이야기 속  멜로디가 나오는 조화 한 송이. 남편이 되어버린 남자에게서 받은 그 꽃. 하도 어이없어 날 웃게 만든 꽃.



큰 딸은 꽃을 좋아한다. 퇴근길. 매일 꽃집에서 산 한송이의 꽃은 딸의 작은 원룸을 향기로 가득 채웠다. 딸은  선물을 자주 받더니만 작은 꽃집 단골이 되었다. 한 송이씩 사던 꽃은 어느 날부터 다발로 바뀌었다. 네 평 남짓만 방안의 선반이나 테이블마다 꽃병이 늘고 모양도 각기 다른 꽃병에 꽃이 꽂혀 있었다.

 딸에게,

"돈 아깝게 왜 자꾸 꽃을 사?. 차라리 그 돈으로 맛있는 거 사 먹지!"

"엄마는 아직 이해 못 하겠지!" ㅎㅎ

뒤로도 한참 동안 원룸으로 어떠 어떠이유를 달고 꽃들의 행렬이 이어졌다. 꽃병에 못다 꽂은 꽃이 있을 정도였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꽃집에서 사던 꽃값이 부담스러웠는지, 딸은 젊은 사장이 운영하는 꽃 농장에서 파는 꽃을 주문하기 시작했다. 그다음으론 꽃꽂이 클래스 수강. 딸의 방에는 돈은 없어도 꽃은 넘치게 많아졌다. 계속될 것 같던  동안 이어지던 꽃 사랑은 조금씩 시들기 시작했다.


이 즈음부터 딸은 푹 빠져있던 꽃을 주문을 통해 농장에서 우리 집으로 보내기 시작했다. 그 덕에  꽃을 자주 보게 되었다. 이리보고 저리보고 콧노래를 부르며 농장에서 직접 보낸 풍성한 꽃을 꽂기 위해 꽃병을 사 들였다. 식탁에도, 싸이드 테이블 위에도  꽃들이 들어와 앉아 있었다. 꽃들은 태평하게 창으로 들어오는 선선한 바람에 연한 꽃잎을 살살 흔들며 살아있음을 선보였다.


꽃은 솔솔 향기를 내뿜으며 현실적  우리 가족의 모습을 지켜봤다. 틈만 나면 티격태격, 삐그덕거리는 우리 가족의 모습을 미소 한아름 안고 보곤 했다. 맞아 그랬다. 우린 가시 돋친 말을 화살촉 날리듯 쏘아 날리다가도 꽃을 보면 그냥 웃고 말았다. 겹이 치마 두르듯 돌돌 둘러싼 꽃잎의 모습에 반하고 또 반했다. 꽃은 꼿꼿하게 서서 리 눈에 꽂혔다. 화려하고 우아한 자태에 향기뿐 아니라 달콤한 맛도 날 것 같은 상상을 하게 했다.



내가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잠깐 쉬는 동안 딸아이의 원룸에서 함께 지낼 때다. 딸은,

"엄마, 원데이클래스 신청해 놨으니 다녀와?"

"그게 뭐 하는 건데?"

"엄마, 꽃꽂이 몰라? 알잖아?"

"아, 꽃꽂이 배우러 가라고? 내가 그런 걸?"

"엄마도 해 보면 재밌다고 할 거야!"

"고마워!"

원데이클래스를 받고 난 꽃이 더 좋아졌다. 꽃을 보는 것뿐 아니라 내 마음대로 꾸밀 수 있어서 좋았다. 플라워리스트라도 된 듯 꽃을 만지고 또 만져 곁가지를 자르고 높이를 조절했다. 너무 튀는 녀석이 없게, 큰 꽃송이에 가려서 제 모습을 보이지 하는 녀석이 없게끔 앞으로 보냈다가, 뒤로 보냈다가 맨 앞줄에 세우기도 했다.


꽃을 보니 기억 저만치 멀어져 간  어릴 적 언젠가 푸른색을 띤 수반에 꽃꽂이를 했던 기억이 새삼 떠올랐다. 원데이클래스는 일대일 수업으로 오롯이 나를 위한 시간이었다. 꽃이 사람이 되고 사람이 꽃처럼 속 마음부터 표정까지 예뻐지는 이상하고 신기한 수업. 딸의 정성을 생각해서 돈을 잃고 수업에만 집중했다.


이때부터다. 내가 변하기 시작했다. 꽃이 이처럼 좋았던가. 내가 받고 싶은 만큼 주는 마음은 더 좋겠지. 그래 앞으론  선물할 일이 생기면 꽃을 선물 하자. 비실용성을 달고 다니는  꽃을 선물로 포장한다면, 나를 경제 감각이 둔하다고 욕할지도 모른다. 사실 둔한 건 맞다. 계산적이지 못하고 마음이 가는 데로 행동하는 나라는 걸 아니까. 알고 있으면 되는 거 아닌가.


난 꽃을 받고 기뻐할 사람들의 모습을 상상하곤 다. 중의 꽃. 예쁘고 사랑스러운 꽃을 찾아 헤매다 주문한다. 나의 주문 내용은 똑같진 않지만 거의 비슷하다.

"20대 여성에게 선물할 거예요. 핑크계열로 야리야리한 꽃으로 해 주시고, 포장은 원형 말고 브이형으로 해 주세요."

사실, 내가 꽃 선물하는 사람 중에 20대는 없었다. 30대 이상부터 중년 여성 친구들뿐. 하지만 꽃을 받는 당사자는 모두 20대라는 마음으로 꽃을 준비한다. 꽃다발을 안고 기뻐할 모습을 상상하면서. 꽃다발을 받은 사람들의 첫 번째 멘트는 거의 비슷하다.

"꽃 선물 받은 게 얼마만인지. 남편에게서도 받기 힘든 꽃을. 눈물 날 것 같아요."


꽃이 말한다. "내가 그렇게나 좋아요. 빨리 시들지 않고 곁에서 오래오래 싱싱하게 머물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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