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목적지를 향해 앞만 보고 열심히 걷고 있는 나를 보고 저 멀리서 누군가 인사를 했다. 그냥 가볍게 인사를 했다면 가볍게 받았을 텐데. 그 사람은 나에게 활짝 웃으며 배꼽 인사를 했다. 나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사람이. 난 답례로 나도 모르게 배꼽 인사를 하고 있었다. 가까이 가 보니 어쩌다 한 번씩 인사하는 그런 사이의 사람이었다. 인사로 인해 갑자기 그전부터 잘 알던 사람처럼 친근하게 느껴졌다.
그랬다. 반사적으로 그 사람과 똑같은 인사를 했던 것이다. 난, 몸을 갸우뚱하며 손을 흔드는 사람에게는 똑같이 넘어질 듯 갸우뚱 인사를 하고, 가볍게 손을 들어 인사하면 나도 그렇게 인사한다. 상대의 눈높이에 맞추어 행동한다. 그러곤 서로 웃는다.
이런 나에게도 쉽지 않은 일이 있다. 웃는 표정에는 웃으며 답 할 수 있으나 , 말끝마다 화가 담기거나 피곤함을 꼭꼭 묶어 표정에 담고 다니는 사람은 상대하기가 힘들다. 같이 있으면 활기찬 나의 기운이 쭉 빠지면서 의욕이 떨어진다. 이런 사람은 어떤 핑계를 대서라도 만나고 싶지 않은 부류다. 사람 좋아하고 말하기 좋아하는 내가 슬그머니 침묵을 끄집어낸다.
인사에도 여러 종류가 있다. 말로 하는 인사, 몸으로 하는 인사, 표정으로 하는 인사. 아무튼 인사 잘하는 사람은 칭찬받아 마땅하다. 그중에서도 입으로 하는 인사와 몸을 같이 사용하는 인사에는 이길 재간이 없다. 그 인사를 어떻게 그냥 넘어갈 수 있을까 맞장구를 쳐야지. 그 보다 더한 인사는 입으로 반갑게 말을 하고, 몸으로 표현하며, 얼굴에 미소가 한가득인 인사. 이런 인사에는 표현이 서툰 사람의 마음도 스르르 빗장을 풀고 만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나를 빗장 풀게 만든 사람의 수를 세어 본다. 못해도 하루에 서너 명은 있는 것 같다. 난 참 복 받은 사람이다.
가을이라 약간 두꺼운 양말을 신은 사람이 등장했다. 사랑한다고, 좋아한다고 상대방에게 보내고 싶고 받고 싶은 하트가 양말을 도배했다. 크기나 색상이 똑같진 않지만 예쁘다. 자꾸만 눈길이 간다. (하트=사랑) 맞을까요?
풍경 좋은 곳에 가서 카메라 앞에만 서면 두 팔로 큰 하트를 그려 보라는 외침이 곳곳에서 들린다. 말로는 못하지만 두 팔로 대신 사랑함을 힘껏 표현해 보는 숫기 없는 사람들. 부끄럽고 간지러워 몸으로 대신 보여주는 것이다. 찬연히.
사랑한다는 그 말을 듣고 싶어 하지만 꼭꼭 감추고 꺼내지 않는 사람이 있다. 이런 사람은 자기 안에 사랑이 있는지도 모르고 산다. 남들 다 가진 사랑. 그 사랑을 생각하며 가슴 깊은 곳에서 끄집어내어 보면 어떨까. 얼마나 예쁠까. 어떤가. 사랑. 사랑. 그 흔한 사랑. 사랑은 눈으로 보고 만지고 예뻐해야 더 예뻐 보이고 발 빠르게 다가오는데.
이 아침. 어제도 아니고 내일도 아닌 지금 이 순간. 선선한 가을바람을 타고도 말하기 힘들고, 화려한 조명을 든든한 백으로 삼아도 힘들다면 이제 하나 남았다. 표정으로 말하기. 입으로 말하기는 어렵지만 표정이 쉬운 사람도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지. 얼굴에 온갖 주름을 끌어모아 웃겨 죽겠다고 웃어댄다거나,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처럼 눈이 촉촉해지는 표정, 쯧쯧 어떡하냐! 안 됐다 하는 안타까움의 표정. 이런 표정들이 살아있는 표정이다. 누군가에게 보내는 이러한 표정들은 공감을 해 주고 큰 힘이 된다.
인사말을 찾지 않아도, 어느 정도 존대를 해야 할지 괜한 고민이 생길 때 쉽게 해결하는 방법이 바로 표정 짓기다. 표정은 많은 것을 내포하고 있으니까. 좋은 사람을 만나면 다른 어떤 행동 보다 웃음 하나면 된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가식적인 웃음은 안된다. 금방 드러나기 때문에. 진심이 담긴 자연스러운 표정이라야 된다. 표정은 그 사람의 대화로 연결되기에.
입가에 수포가 생기고, 마음에 덜어낼 수 없는 아픔 덩어리가 굳기 전에 표현하고 말하자. 힘들면 힘들다, 아프면 아프다, 좋으면 좋다, 곁에 있어달라 말하자. 쿨하게. 말하지 않아도 다 알 것 같다고 생각하지만 그런 사람은 없다. 티를 내야 한다.
"나, 지금 시간이 필요해!"
"너도 힘들겠지만 나도 힘들어"
"나, 그만 쉬고 싶어!"
"네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으나 난 너를 좋아하고 사랑해"